아무리 좋은 제품이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설득이다. 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서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히 생각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중들을 설득하여 지지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든 보수든 자신들의 주장을 어떻게 포장하고 전달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점점 세련되어지는 보수파들의 포장과는 달리 운동권으로 대표되는 진보주의자들의 의견은 '진보'라는 이름에 비해 구시대적인 면이 많다. 이로 인해 학생들에게서조차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일반 대중에게 좌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변함없는 형식과 화법

‘민중’, ‘투사’, ‘반 자본주의’, ‘학생투쟁’ 등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들과 특유의 붓글씨체 같은 것은 상당히 운동권스럽다. 운동권이 운동권스러운걸 왜 비판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단어들은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느낌을 주어 운동권의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글을 읽기 전에 화자가 운동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들의 의견을 깊게 고려하기 전에 운동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의견을 설파하거나 대중에게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게시물은 ‘중도적인 의견을 가진 보통 사람’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굳이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에 타당하잖아."라고 자화자찬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권에서 평균적 학생이라는 청자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이 대자보를 읽고 일반적인 학생들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전하는 일방적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다.


길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이 “현대사회에서 윤리적 고민을 종교로 나누고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 했을 때와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 성경말씀대로 행하면 구원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공감이 가겠는가. 분명 외부인과 소통할 때는 내부인끼리 소통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대학생들과의 공감 없는 운동권

그렇다면 이들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가. 커피숍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을 만남의 장소가 없는 대학생의 현실에서 생각하기 이전에 자본의 간계로 설명하고 토익 시험을 비롯한 스펙쌓기에 열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본의 힘과 자본주의의 몰인간적 성격으로 설명한다. 대부분 자본의 포악성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학생 개인에게는 너무나 거대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이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당위감보다 무력감이 먼저 밀려오는 것이다. 메시지에 이성적 동의는 가능할 수 있어도 감성적 공감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운동권의 메시지의 또 다른 문제는 대학생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커피숍에 가는 사람들을 허영심에 가득한 사람으로, 스펙을 쌓는 사람들을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가 된 사람으로 직접적으로는 이야기 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당신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고 우리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어요."라는 성균관대 4학년 김모양의 말처럼 운동권의 화법은 평범한 대학생을 죄인처럼 느끼게 만들어 거부감을 만드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이 자본적 가치를 일절 무시하고 취직 걱정 없이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의 각계각층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 사회에 적응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격적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변함없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할 수 있게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운동권의 대표성

물론 현실적임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인 의견을 내어놓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운동권이 진보의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동권의 행보는 현실 정치와 여론에 많은 영향을 준다. 즉 이들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나빠지는 가운데 이들이 변화가 없다면 모든 진보주의적 사상의 현실화, 즉 투표에서 표를 이끌어 내는 데 있어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을 위해 시간 바쳐 노력했던 운동권 학생들에게도 감사하는 동시에 화가 나기도 한다. 오랜만에 많은 대중들이 참가하는가 싶었던 대학생 등록금 투쟁도 80년대 민중가요나 불러제끼는 시대착오적인 진행으로 점점 세가 줄었고, 몇몇 운동권들은 그런 방식의 문제를 반성하기보다 일반 노조를 끌어들여 운동을 확대할 단순한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등록금 시위 이용하려는 불순한 세력’이라고 찍어내는 보수 언론만 탓할 것이 아니다. 어차피 조중동은 100년 뒤에도 있다. 결국 시민들에게 등록금 시위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 단초를 제공한 운동권 자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매뉴얼만 있고 현실 대처는 없는 전략 때문에 등록금 문제가 시급해서 참가했던 일반 대학생들만 피해를 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운동의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고갈에서 나타난다. 삭발식, 단식투쟁, 점거농성 등의 ‘강한’모습을 대중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진지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진지하지 못한 이 시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덜 진지한 방법으로 다가가야 한다. 시대의 분위기와 맞아 떨어졌던 촛불시위는 많은 참가를 이끌어 냈고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때마다 새로운 운동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기존 방법의 답습은 일반인들이 운동과 점점 괴리되는 역할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