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은 언제나 애틋하고 애절하다. 상대를 바라 볼 때의 시선과 사유는 오로지 혼자만의 것이어서, 곁에 두었을 적의 만족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마냥 금세 사그라지고 안타까운 한숨만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홀로 잠자리에 누워 펼치는 공상은 어느새 한편의 드라마가 되고 다시금 현실 속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킬 때 느끼는 괴리감은 모든 걸 내동댕이치고 싶은 욕구까지 자아낸다. ‘콘트라베이스’는 이와 같은 애처로운 짝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만 작가가 풀어가는 드라마는 당신의 짝사랑 이야기만큼이나 적적하진 않다. 적어도 주인공에겐 그의 악기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mudaepo5682?Redirect=Log&logNo=70107932257



이야기는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주인공의 방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등장인물이라곤 하소연을 늘어놓는 이 남자 밖에 없다. 단지 옆에 그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가 놓여 있는데 이것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콘트라베이스는 모든 악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오케스트라 속에서도 꼭 필요한, 중요한 악기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콘트라베이스는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오케스트라 속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원들 가운데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의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소시민으로써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은 그저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고 주변에서 아무도 그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것에 대해 아무 불만을 갖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 역시 자신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인공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인 소프라노 ‘세라’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매우 안타까워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콘트라베이스에 대해 불평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써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 인사조차 받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고 모두의 주목을 받는 소프라노 세라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심지어 그가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는 그 특성상 소프라노와 한자리에 설 기회조차 거의 없다.

현실 속 대부분의 짝사랑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와 자신의 위치가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주위에서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이다. ‘콘트라베이스’ 속 오케스트라의 보이지 않는 계급처럼 우리 주변에도 각자의 모습과 능력에 따른 계급이 존재한다. 이를 넘어선 애틋함이 싹텄을 때 애절하고 비참한 모습의 자신이 한심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은 다가올 공연에서 그의 짝사랑, 세라의 이름을 외치며 고백할 것을 다짐한다. 그 다짐과 함께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그러나 과연 주인공은 그 다짐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아마 그는 그러지 못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다시 살아갈 것이다. 소설 속 그의 말마따나 행동에 옮기는 것보다 공상을 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수겠느냐. 그가 세라의 이름을 외치지는 못했을지언정, 여전히 그는 짝사랑을 할 것이고,  또 세라를 생각하며 묵묵히 콘트라베이스를 연주 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 속 우리들의 짝사랑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