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근래 한나라당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몇 달 째 내홍을 겪던 한나라당이 모처럼 활짝 웃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등장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14일 쇄신파 의원들과 모임을 가진데 이어, 15일에는 2년 7개월 만에 의원총회에 참여했다.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 한미 FTA 날치기 논란,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의 악재로 잔뜩 흐려졌던 당내 기상도는, 박 전 대표가 나타나자 일거에 ’맑음‘으로 바뀌었다.

▲출처 : SBS


박 전 대표는 쇄신파 의원과의 만남에서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을 언급했고, 공천 문제에 대해선 “인재가 모여드는 것에는 우리의 희생도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쇄신파 황영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총선까지 전권을 가지고 가는 것은 저희가 다 인정한다. 과감하게 계파를 초월하는 공천이 있을 것"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말을 자세히 뜯어보면 묘한 구석이 있다. 자진사퇴한 홍준표 전 대표가 일주일 전 내놓았던 쇄신안과 유사한 것이다. 홍 전 대표는 “자기희생적이고 과감한 인재 영입을 감행”하고, “백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당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었다.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홍 전 대표의 쇄신안과 박 전 대표의 말은 유사한 정도가 아니다. 아예 같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응은 극명히 엇갈렸다. 홍 전 대표를 두고는 ‘기득권 지키기’라며 공격해 결국 그를 지도부에서 끌어내렸지만, 박 전 대표에게는 찬사를 쏟아냈다. 홍 전 대표는 입을 연지 하루 만에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박 전 대표는 입을 연지 하루 만에 당헌·당규가 전면 개정되어 당권과 대권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지독한 역설이다.

박 전 대표의 의원총회 참석은 2년 7개월만이다. 그래서 더 아이러니하다. 자신들의 손으로 선출했던 당 대표는 끌어내렸으면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당무엔 침묵을 지켜왔던 사람은 박수로 맞고 있다. 게다가 그 둘의 쇄신안은 별반 다르지도 않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당 대표를 사퇴시키고 몇몇 의원의 탈당으로까지 번졌던 한나라당의 쇄신 바람은 무엇이었나. 결국 박근혜 전 대표의 등판을 위한 ‘쇼’에 불과했던 것인가.

▲박 전 대표와 유사한 쇄신안을 내놓았으나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자진사퇴한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나라당은 그의 구원등판으로 일단 당 내부에서 일어난 불은 끈 모양새다. 당 내부의 갈등은 봉합되었고, 지도부 부재 문제도 해결되었다. 당을 향한 박 전 대표의 ‘제스쳐’도 훌륭하다. 전면에 나서기 전 쇄신파 의원들을 만나 이견을 줄였으며, 이 자리에서 “친이·친박은 없다”고 말하며 다른 계파 의원들의 반발 역시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역량’이 뛰어나다 한들, 그의 등판이 당 밖에서 번지는 불길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쇄신 바람으로 뭔가 크게 변할 것 같더니 결국 잠잠히 가라앉고 말았다’는 여론 역풍이 불 수도 있다. 그때는 더 이상 구원등판시킬 투수도 없다. 그저 넋 놓고 당이 침몰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앞서 인용한 속담을 조금 바꾼, ‘열길 의원 속은 알아도, 한길 국민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다. 이번 국면을 잘 넘긴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능구렁이 같은 의원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순수하고 곧은 국민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진정한 쇄신은 의원들의 찬사가 아닌 국민의 찬사를 불러올 때 완성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