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멀티미디어 공학과에 재학 중인 김규식씨(25)는 소설을 쓴다. 그냥 쓰지 않고 꽤나 열심히, 줄기차게 쓴다. 공학도가 어쩌다가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또는 글쟁이가 어쩌다가 공학을 전공하게 된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사탕을 오물거리며 진행된 인터뷰에서 소설 쓰는 공학도는 그 탄생비화뿐 아니라, 두 일을 병행하는 데에서 오는 고충과 나름의 인생철학까지 들려주었다.


공학도이시면서도 소설을 쓰시는 게 특이하네요. 소설을 어떻게 좋아하시게 됐는지를 들어보고 싶어요.

어렸을 때의 이야기부터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는 걸 좋아했었거든요. 몇 시간 동안 눈감고 스토리를 만드는 거예요. 방에 앉아서도 상상하고, 누워서도 상상해요. 어렸을 때 했던 상상 속 이야기에서는 주로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배경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아닌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의 배경도 실존하지 않는 곳들로 확장됐어요. 또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레고를 미친 듯이 만들기도 했는데 한번 시작하면 오랫동안 레고에 빠져서 구상하고 만들기를 반복했어요. 설명서에서 보여주는 형태들로는 만들지 않고 매번 다른 모양들을 창조했었어요. 그렇게 상상하고 창조하는 걸 좋아해왔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있는 걸 현실세계로 끄집어 내고 싶어졌고, 그 방법으로 소설쓰기를 찾아내게 됐어요.



표현의 방법으로 소설을 선택하시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군대에 있을 때부터예요. 그 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소설의 매력에 빠져 몇 권쯤 읽어보고 나서 ‘이런 건 나도 쓰겠는데?’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나름대로 구조도 파악해보고, 작가마다의 표현방법들을 분석해보기도 하면서 소설을 써보기로 마음먹었어요. 며칠 동안 A4 30페이지 정도 분량의 소설을 써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형편없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만큼 수준 낮은 글을 써놓고도 다시 하면 성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대신 독서가 좀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글쓰기는 매일 조금씩 병행했고, 무턱대고 소설쓰기를 시작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죠.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을 둔 다음 다시 단편을 써보기 시작했어요. 쓰다 보니 차츰 실력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장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제목은 피닉스의 죽음이에요.

그 장편 교수님한테도 보여드렸었죠? 평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문과대 수업을 들은 걸 계기로 친분을 쌓은 교수님에게 평을 부탁 드렸었죠.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소설을 써오니까 신기해 하시면서도, 솔직하게 평가하겠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겁을 많이 주셨었어요. 그런데 읽으시고 나서는 재미있어서 단번에 읽으셨다면서 좋게 평가해주셨어요. 그래서 자신감을 얻어 얼마 전에 출판사 공모전에 도전하기도 했고, 지금은 발표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왜 소설을 좋아하시면서도 공학을 전공하시는 거죠?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저는 문과에 진학해서 영화감독이나 작가처럼 제 상상을 표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부모님의 뜻과는 엇갈렸었죠. 특히 아버지께서는 보다 안정적인 진로를 원하셔서 제가 이과로 진학하기를 희망하셨어요. IMF시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저는 어렸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어려움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아버지 뜻에 따라 이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했었죠. 그렇게 결정한 이후로는 그 전까지 제가 꿈꿨던 일들을 포기했었어요. 군대에서 소설을 접하면서 꿈이 다시 살아났었지만요.



꿈과 현실 모두를 쫓고 계신 거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아쉬운 점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시간의 제약이 가장 커요. 제가 전공하는 분야의 취업준비를 하면서 소설도 쓰니까 같은 시간에 두 가지 일을 하기가 어렵죠. 인맥이 부족한 것도 아쉬워요. 소설을 쓰는 친구가 주위에 전혀 없기 때문에 소설과 관련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거든요. 또 제가 소설과는 관련이 없는 전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차원에서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점도 큰 아쉬움 중 하나죠.

만약 문예창작과에 진학했었다면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소설과 다른 일을 같이하는 데서 얻는 장점들도 의외로 많거든요. 저한테 소설은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게 의무가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순수한 자의에 의해서 소설을 쓰게 되고, 보다 자유로운 글을 쓰게 돼요. 의욕도 강하고요.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면 아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보기 힘들었을 테고, 소설가를 직업으로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수도 있겠죠. 제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전업작가로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에 금전적인 조건도 포함될 거고, 제 글에 다른 분들의 요구를 반영해야 할 때도 있겠죠.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것들이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제 경우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를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저는 봉사를 좋아했었는데 막상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서 의무적으로 봉사하다 보니 호감도 떨어지고 하기 싫어졌었거든요. 그러니까 꿈을 다른 일과 병행하는 것이 때로는 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자율성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좋아하는 일을 어느 정도는 돈과 연결시키게 되잖아요. 그 때문에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여러 제약들이 발생할 수 있겠죠. 반면에 저는 다른 일과 소설을 병행하면서 소설에 대한 갈증을 계속 가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말하자면 오히려 소설과는 동떨어진 일로 창작욕을 제외한 여러 가지 욕구들을 채우고, 대신 창작욕은 고스란히 소설에 쏟아 붓는 거죠.

마지막으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으면 해요. 흑백논리로 생각하지 말고 둘을 모두 가져가도 되잖아요. 꼭 큰 목표를 달성하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궁극적으로는 소설을 출간하고 싶고, 작가가 되고도 싶어요. 그렇지만 지금 다른 일을 하면서 소설을 쓰는 것도 행복해요. 소설쓰기 자체를 즐기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병행이 가능한 건, 소설이라는 영역이 비교적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정말 원하는 건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지만, 현실의 제약과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제 상상과 창조들을 표현하기 위해 찾은 게 소설이거든요. 꿈에 대한 욕심이 크고, 꿈을 통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분이라면 제 경우와는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꿈을 걷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다른 일과 병행하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요.


소설 쓰는 공학도는 그리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타인의 인생을 사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고 강조했던 스티브 잡스의 눈에는, 그가 타인의 인생을 사는 불쌍한 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행복해 하고 있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도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현실이 반가워하지 않는 꿈이라면, 그래서 그 꿈을 쫓는 것이 자신을 의심하게 하고 주변인들에게 우려를 준다면, 현실과의 타협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들이 많이 있다. 그들 중에는 꿈과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을 버리고 꿈을 쫓으라는 목소리와 현실을 위해 꿈을 잊으라는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에게 김규식씨의 사례는 충분한 희소성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