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에 점령된 대학가

얼마전 MBC <뉴스후>에서는 “커피 한잔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스타벅스, 커피빈 등 고급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들을 조명했다. 과도하게 책정된 커피값에 대한 내용이다. 프로그램을 보면 강남역 주변에만 스타벅스, 커피빈, 앤제리너스, 파스쿠치 등의 커피전문점이 30개에 달한다고 한다.

시내중심가뿐만 아니라 대학가도 이들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스타벅스가 처음 생긴 곳이 이대앞이니 당연한 일이다. 개인들이 운영하는 일반적인 커피숍들도 살아남기 위해 스타벅스와 비슷한 인테리어와 메뉴, 시스템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푹신한 소파에서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커피숍을 찾는 이들에게는 스타벅스 류의 커피전문점은 사실 매력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다지 편하지 않은 의자, 소음과 섞여 잘 들리지 않는 음악, 셀프서비스 시스템, 비좁은 공간 등 불편하기 그지 없다. 그렇다고 커피맛이 정말 뛰어나다고 볼 수 도 없다.


스타벅스에 “나”는 없다.

그런데도 왜 대학생들은 스타벅스를 갈까? 스타벅스를 간다는 것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라는 문화상품을 소비하러 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루이비통”과 “구찌”를 들고 다니는 것 처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스타벅스에서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곳에서는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나는 커피숍의 알바와 주인조차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는, 대중속의 이름없는 한 명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곳에서 나는 이름이 없는 그냥 한 명의 손님일 뿐이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발길을 다른 곳으로

90년대까지도 대학가에는 외상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돈이 없어도 거래가 성립한다는 것, 그것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관계는 내가 손님으로서의 기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한 명의 “손님”에서 이름과 얼굴을 가진 한 명의 '친구', '동생', '조카', '아들'로 변하면서 생긴다. 그 공간의 타자에서 주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그 탈바꿈을 두려워한다.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 아닌 곳에서는 그냥 익명의 대중으로만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하다 못해 자주 가던 떡볶이 포장마차에서도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면 다른 포장마차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는 한 대학생의 말은 관계맺기를 거부하는 요즘 대학생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대학 선후배, 친구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파편화되어 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외상장부에 우리 이름을 쓰자!

88만원 세대라고 명명되어진 지금의 20대들은 우리 사회의 타자이다.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5%만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시겠다는 말씀에 나홀로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관계는 상호간의 문제이다. 그들이 우리를 불러주지 않지만, 우리 또한 그들에게 우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우리끼리도 관계를 맺지 않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20대는 존재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88만원이 아니라 888만원을 달라고 하자. 800만원은 외상장부에 달아놓고. 나중에 8000만원으로 사회에 돌려줄 테니 말이다.

그러려면 외상장부에 쓸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