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가 지구인의 마지막 남은 무기인 치아를 없애기 위한 (또는 솔로의 복장을 터지게 할) 외계인의 음모라면, 화이트 데이는 재고처리를 위한 '일본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의 기발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라고 해야겠다. 1978년, 발렌타인 데이의 성공적인 정착에 자극받은 일본의 제과업계는 이에 대항하는 날을 만들고자 한다. 기존에 있던 '마시멜로데이' (이시무라 만세이도라는 마시멜로업체가 1977년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1980년 정식으로 화이트 데이를 마케팅을 시작하게 된다. 소비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화이트 데이는 금방 정착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에까지 성공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화이트데이지만 당초에 제과업체들이 제창했던 화이트데이는 참 소박했다. 물론 발렌타인 데이처럼 사탕 한번 팔아보자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발렌타인 초콜릿을 보답하고 싶다는 소비자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발렌타인 데이가 여성이 용기를 내 고백할수 있는 단 하루라면, 화이트 데이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날,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하는 날이 되었다. 소박하지만 달콤한 사탕과 마시멜로에는 적어도 사랑 한 줌 정도는 담겨있었다 할 수 있겠다. 


2012년 현재, 화이트 데이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마시멜로 대신에 사탕과 초콜렛을 주는 날이 되었고 이제는 일본만이 아닌 한국의 기념일이기도 하다. 과거의 화이트 데이가 소박한 사랑고백의 날이었다면 이제 화이트 데이는 명실상부한 연인들의 축제가 되었다. 거리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가득하고 가게마다 연인들을 위한 화려한 이벤트가 가득하다. 그렇게 화이트 데이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달라진 점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조사 결과 화이트 데이 때 여성들이 가장 받기 싫어하는 선물은 화이트 데이의 상징인 사탕이었다. 반면 화이트 데이에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귀금속이었다. 201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화이트 데이는 안타깝게도 사랑을 속삭이는 날이 아니었다. 여성들이 값비싼 선물을 바라는 날, 남성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야 하는 날이 되었다. 가게들은 앞다투어 커플들을 유치하고, 백화점 명품관은 호황을 맞는다.

가끔 지나친 화이트 데이 상술을 우려하던 언론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말하는 것조차 잊은 듯 화이트데이를 겨냥한 광고기사만 넘쳐나고 있다. 올해는 어떤 화장품을 선물해야 한다느니, 명품백의 매출이 얼마나 올랐느니 하는 기사가 뉴스란을 덮고 있다. 사탕 하나에 마음을 전하던, 소박하기에 순수했던 그 날은 이제 없다.

3월 14일, 삐뚤어진 욕망이 흥청거리는 날이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며, 인류의 역사를 극적으로 바꾼 거장 칼 마르크스가 잠든 날이기도 하다. 이 날 밤, 이제는 천박하기까지 한 화이트 데이를 기념하기 보다 칼 마르크스를 위해 건배하는 건 어떨까.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