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혹시’, ‘반드시’…고양 원더스 아이들은 ‘어차피’에 속하는 아이들입니다. 사람들이 패자부활전에 버린 아이들이에요. 그러나 ‘혹시’라는 말에는 희망이 있고, ‘반드시’는 절대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 있죠. 나는 아이들을 ‘어차피’에서 ‘혹시’를 넘어 ‘반드시’에 속하는 선수로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어차피’를 ‘반드시’로 만들 때는 모든 전력투구를 다 해야 합니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의 말이다. 지난 8일 롤링홀에서 있었던 ‘인디 음악인을 위한 벼랑끝 전술 특강’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 역경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롤링홀 같은 공연장에 오니까 이상훈이 생각난다.”고 농담을 하며 “인디 음악인’을 위한 강연 행사지만, 굳이 음악인에 국한되지는 않고 어려운 생활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런 테마로 내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다.” 며 강연을 시작했다.




학창시절, 긍정의 사나이
 

냉혹한 이미지의 김성근 감독과 ‘긍정’이라는 말은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긍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타고난 것 같아 보이는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지금의 김성근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성근 감독은 재일교포 2세로서,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등·하교 때 남들 다 타는 전철 한번 타 본적이 없고, 수많은 일을 해서 학비를 전부 벌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집이 가난하다고 불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은 당연히 했고, 시장이나 백화점 또는 밤에 막노동도 많이 해봤어요. 그러나 그 순간순간을 잘 견뎌냈고, 남에 대해 부러워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우유배달 같은 것은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우유배달을 하면서는 우유를 많이 마셔서 키가 많이 커졌어요. 중학교 때는 앞에서 4번째였는데, 고등학교 가니까 뒤에서 두 번째더라고요.”

그는 야구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일본 중학교 야구에서는 항상 가장 못하는 선수를 ‘우익수’를 시키는데 그는 언제나 우익수를 도맡아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안타를 치고 1루를 밟으려고 하는데 발이 너무 느려서 뛰는 동안 공이 들어와 아웃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과부터 생각하면 안 돼요. 저는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건 우직하고 순수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야구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반신을 단련하기 위해 야구도구를 매고 4~5km를 발꿈치를 들고 걸고, 발이 느려서 육상부 감독의 지시를 듣고 내리막길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어요. 목욕탕에 가면 탕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서 무릎 사이에 팔을 끼운 후 공 던지는 동작을 하면서 팔을 부드럽게 했어요.”

누가 시켜서 훈련 한 것이 아니다. 조직적으로 훈련 받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그는 홀로 훈련했다. 그는 “남이 시켜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는 거니까 오히려 의욕적으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열악한 조건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와서 야신(野神)의 길로
 

김성근 감독은 재일교포 야구단으로 처음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그때 먹어본 불고기와 오므라이스가 너무 맛있어서 크게 놀랐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그전까지는 소고기라고는 일본 사람들이 버린 곱창밖에 먹은 적이 없었다. 스스로 “불고기의 맛이 나를 한국으로 유혹한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야구단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한국에 정착한 그는 60년대 초 교통부와 중소기업은행 등의 실업팀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한 시즌 20승 5패를 거두고, 대표팀에도 선발되서 활약하는 등의 선수생활 최고의 시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팔꿈치와 어깨가 나가 버리면서 그는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재일교포로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데 한국에 와서 야구를 못하면 죽겠다고 싶었어요. 그런데 밥 먹을 때 팔이 안 들리는 거예요. 현역 마지막에는 1루수를 했는데 홈까지 공이 안가더라고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발상의 전환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자진해서 1루코치로 나가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죠.”

처음 김포공항에 내려서 ‘대한민국 최고투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는 짧은시간이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로 활약한다. 그리고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로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포수의 사인과 투수의 움직임을 보기 시작했다. 그의 데이터 야구는 60년대 후반부터 벌써 그 기초를 닦고 있던 것이다.

“항상 ‘왜?’라는 말을 갖고 살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버려요. 저는 피쳐(투수)가 손을 사타구니 쪽으로 가져가는 (공 던지기 직전) 그 찰나에 실밥을 어떻게 잡는지 보고 변화구 직구를 판단해요. 민감하고 세심하게 봐야 해요. 제가 프로에 있을 때 사람 얼굴을 안보고 항상 운동장을 봤어요. 버릇을 돼서 아예 옆을 안 봐요. 그러니까 어딘가 아파보이는 선수들은 바로바로 보여요.”

그는 실업팀인 ‘중소기업은행’의 감독과 대표팀 코치, 그리고 충암, 신일이라는 야구 명문고교의 감독으로 역임하며 이름을 날린다. 그중 충암고에서의 일화는 김성근 감독이 감독의 막중한 책임감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김성근식 야구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전국고교야구 대회 8강전에서 신일고에게 2:3 역전패를 당했어요. 그 당시 조범현(기아 전 감독)은 다른 지역에서 데려온 강타자였는데, 지고 나서 ”이제 우리 어찌 대학가노“하면서 땅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동대문운동장부터 숙소까지 걸어가면서 애들이 영구차 탄 것처럼 울었습니다. 그 때 감독으로서 ‘아이들의 미래’를 내가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책임감이 지금 내 야구의 토대가 되었어요. 물론 그 일이 있고나서 봉황대기 우승을 했어요.”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로는 김성근 감독은 2011년까지 OB, 삼성, 태평양, 쌍방울, LG, SK등 수많은 팀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그는 한 틈도 쉬지 않고 40년 동안 13개 팀을 거치며 야구 지도자 생활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SK는 그의 지도자 생활의 절정이었다. 팀은 4시즌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3시즌은 우승하면서 김성근 감독은 말 그대로 야신(野神)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sk가 강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만족은 파멸이에요. 겸허하게 고개 숙이고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sk야구의 강점은 겸허한 것입니다. 이겨도 연습시키고. 몰아가고 몰아가고 또 몰아갔어요. 프로는 완벽한 걸 추구하는 거예요. 내가 있을 때 sk가 공공의 적이었는데 SK는 우승 했을 때 더욱 정신무장하고 실력을 올려놨어요.”
 

 

ⓒ 야구타임스

 
 

새로운 도전, 고양 원더스
 

최고의 팀을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은 쉬지도 않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재기를 꿈꾸는 야구선수들에게 프로에 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립팀 ‘고양 원더스’에서의 도전이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해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싸울 용기가 없으면 사람이 끝입니다. 싸운다는 자체가 나중에 사람의 길을 열어주지 않나 싶고, 도전한다는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단 싸울 때 ‘이길 수 있다.’, ‘질 수 있다.’이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순간순간에 이익이냐 손해냐 따질 필요없이 트라이하면서 사람이 커지는 것 같아요.”

처음 본 고양 원더스 선수들의 몸은 운동하는 사람같지 않게 불어있었다.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마음대로 못 꽃았고, 타자들은 외야수를 넘길 만큼 치지를 못했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은 작년 겨울에 몸이 불은 선수들을 하루종일 우동 한 그릇만 먹이고 훈련시켜서 살을 빼게 하고, 가능성 보이는 선수들을 쉬는 날 따로 불러내서 특훈 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는 선수들에게 야구를 하는데 있어서 ‘절박함’을 느끼게 만들어 오기를 불어넣었다.

고양 원더스 선수들은 처음보다 많이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양 원더스 선수들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룰 정도로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시켜도 어느 수준이 되면 타성에 젖어들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최대 관건이라고 말했다. 고양 원더스는 지금 퓨처스리그팀들과 시합을 하고 있는데, 김 감독은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라고 보고 있다며 ‘오할’승률을 이뤄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장 내에서 선수들과 스케쥴을 같이 소화하며 오히려 쉬는 날에 선수들을 따로 불러서 보충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사람은 거기서 즐거움을 찾을 필요가 있다. 즐겁다고 생각하면 즐거워진다.”며 생각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긍정, 용기 그리고 철저한 준비와 노력


김성근 감독은 강연을 끝내기 전 청중들에게 마지막으로 조언 했다.

“변화해야 할 때가 있어요. 변화는 어떤 것을 버리고, 더욱 중요해 보이는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근거가 있어야 해요. 근거도 없이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한번은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실패를 갖고 옵니다. 근거가 있는 변화를 추구 하세요”

“저는 만족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을 때는 겸허하게 나쁠 때는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일을 행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리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우직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김성근 감독의 강연 내내 강조됐다. 그러나 일에 대한 그의 치밀한 준비와, 끊임없는 노력이 없었다면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나, 용기 역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의 말에서 ‘근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뜻일 것이며, '만족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말에서는 성공의 ‘전술’적인 방법을 얻어갈 순 없었다. ‘긍정적인 생각’, ‘끊임없는 도전 정신’, ‘항상 노력하는 자세’ 등...전부 식상한 내용이었다. 성공하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도 김성근 감독의 인생 이야기에 담기니 달리 들렸다. 김성근이라는 '사람'의 힘이었다. 뻔하고 지루한 내용이, 그의 입에서 나오니 힘이 실렸다. 한 분야에서 ‘신’이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의 삶이, 재능이 아닌 끊임없는 의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강연을 들은 젊은이들, 음악인들이 충분히 격려 받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김성근 감독 말말말
 

“쌍방울 시절에는 구단이 어려워서, 선수들의 기를 살리려고 심판들에게 항의도 자주하고 일부러 시비를 건 적도 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김재박 감독에게 미안한 경우가 생겼다. 김원형(현대)이 박경완한테 빈볼을 던져서 내가 그라운드로 나가니까, 김재박 감독도 나오더라. 그래서 김재박 감독에게 “안 들어가 이xx야”라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그래서 김재박 감독은 별 말없이 들어갔는데, 지금까지도 미안하다.“

"SK 선수중에 제일 절박하게 야구하는 건 최정이다. 2006년,2007년 캠프에서 최정만큼 연습하는 애를 못봤다. 최정은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훈련하고, 밤중에 공을 치다가 안 맞으면 소리를 질러대서 집에 보낸적도 있다."

"신일고에서는 폭력사건이 일어나고 그 이후에 선수들의 집단 이탈이 발생했다. 나는 애들을 모아서 주장이었던 민경삼이한테 배트를 주며 '너희가 어떻게 사람을 때렸느냐, 나도 그렇게 때려봐라'고 했다. 애들은 나를 못 때리고 눈물만 흘렸고 그 이후로 신일고는 정신무장을 해서 우승을 했다. 그런데 민경삼이는 그땐 나를 못때리더니 나중에 SK단장이 되어서 내 목을 자르더라."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실 작년에 치질에 걸렸었다.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오면서부터 화장실에서 야구책을 거의 1시간이상 본 결과였다. 의사한테 말하니 ‘가장 나쁜 버릇’이라며 엄청 혼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