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봉하마을에 칩거하던 2009년 봄,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식단을 핑계로 친구들과 교문 밖에 나와 점심을 먹던 중 TV 속의 그를 보았다. 퇴임 후 모습이 뜸했던 그는 여러 대의 호위차량에 둘러싸여 검찰로 출두하고 있었다. ‘저런 것도 생중계를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던 중, 한 친구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호위차량은 왜 붙이는 거야? 저거 노무현 보고 내라고 해야 해. 돈 아깝다.” 별것 아닌 걸로 잡는 트집이 우스웠지만, 정치인에 호불호를 가진 친구가 신기하기도 했다. 당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정치뉴스가 따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서거했다.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놀란 나와 친구들은 괜히 달아올라 감상을 나눴고 그 친구는 이번에도 볼멘소리를 했다. “쪽팔리는 일이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살을 하냐, 한국 망신 시켰네.” 인정머리 없는 말에 자극받은 나는 친구와 언쟁을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나의 얕은 정치 지식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해 좋은 평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작 나의 부모님부터도 대통령 씹기가 국민 스포츠라며 농담하곤 했었기에.




그의 서거 후 다시 맞은 2010년 봄, 나는 유시민의 팬이 되어있었다. 우연히 접한 ‘청춘의 독서’를 좋게 읽은 나는 다른 책들도 읽어나갔고, 그 안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참여정부의 기억을 통해 자연스레 고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스무 살 같았다. 때 묻은 세상 속에 홀로 고결해 보였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씩씩히 걸었던 사람으로 보였다. 꿈에 부풀어 있던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그는 무지 멋져보였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부모님은 왜 그를 조롱거리로 삼았던 것 일까. 때 마침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유시민에 관한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참여정부 사람들이 싸가지 없다고 했다. 말을 생각 없이 해서 싫다고 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는지, 혹시 정책이 별로였냐고 되물었지만 기대하던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왜 그럴까 다시 생각했다. 그가 취임하던 2003년 우리 집에는 조선일보가 배달되었었고, 무료구독이 끝나자 중앙일보로 바뀌었었다. 그게 답이었을까. 촛불시위에 나가는 친구가 바보같이 보였던 것도, 봉하마을을 호화 별장으로만 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친구들 집에 배달되는 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유시민이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후 가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의 패배가 아쉽다 말했고, 그러자 한 친구는 나를 빨갱이라, 김정일 똘마니라 비난했다.

2011년, 그의 서거가 쪽팔린다고 했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 참여정부 때 부동산 정책에 세금폭탄을 맞은 곳이 자기 집이라고,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싫어한다고 했다. 몇년 째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는 친구의 아버지는 미디어법을 이야기하며, 볼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나는 좋은 법이라고 설명했단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정치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아버지와는 여러 면에서 관점이 달라보였다. 친구의 변화가 신기했으나, 사실 변화는 흔했다.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인지, 신문 볼 시간이 없어서인지, 친구들의 시각은 예전과 달랐다. 몇몇은 SNS에 등록금시위참여를 인증했다. 친구 몇은 나꼼수에 빠졌고, 만나기만 하면 조현오 성대모사를 했다. 친구들은 MB가 구리다고 했다. 조중동을 찌라시라고 불렀다.

2012년,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었다. 그는 언론개혁을 이야기 하며, 언론이 국가권력이나 시장권력이 아닌 시민권력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론은 바뀌지 않았고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TV에는 낯선 채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언론도 등장했다. 올해 봄, 친구들은 SNS에서 총선을 논했다. 우리들의 논의에는 다양한 기사들이 스크랩되었으며, 그 기사들에 동조하거나 비판하고 나누었다. 겨울에도 그럴 것이다. 우리 세대의 언론만은 그의 뜻대로 개혁되었다. 부모님들이 구독하는 신문은 바뀌지 않았지만, 나와 친구들의 언론은 더 이상 부모님도, 그 신문들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