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딩과 고삐리의 차이 - 17시간 20분

내 나이는 21살, 작년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던 나는 '청소년 딱지'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술집에서 술을 먹을 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혹시 고등학생 아니에요?’라는 질문에 당당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나의 ‘민증’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는 기껏 2개월 차이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만큼 나에게 '청소년'이라는 것은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한 웹툰에서의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300분 남짓한 수면과 100분가량의 식사시간을 제외한 17시간 20분... 이 시간엔 오직 공부만이 허락된다.'라는 묘사를 보듯, 청소년은 공부 이외의 것을 선택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게다가 청소년 시기에는 유달리 '되는 것'과 '안 될 것'을 구분당하고, 그 틀을 벗어났을 땐, 벌점과 체벌 등의 여러 가지 수단들이 억압한다. 웬만한 수용소나 감옥을 가도 ‘재소자(在所者)’를 이렇게 학대할 수가 없다. 허나 이것이 우리 청소년의 모습이고 삶이다.
 

 



취중대담 : 20대, 청소년 시절을 생각하다.
 

나의 청소년 시기를 되돌아보던 차에, 마침 나에게 청소년을 추억하고 이야기할만한 기회가 생겼다. 봄바람이 따스했던 5월의 어느 날, 작년 학생 인권포럼에서 만났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인권운동가 임명훈(20)씨와 여성언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은빈(가명·27)씨를 만난 것이다. 3명이서 오랜만에 술 한잔을 하며 2차로 갔던 막걸리 집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소년의 대한 생각과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학교 생활하다보면, 여러 가지 교칙들을 볼 수 있었는데, 혹시 생각나는 것 있나요?

명훈
:
단연, 두발규제가 아닐까 싶어요. 저의 중학교까지만 해도, 장학사가 오는 날이나 특별한날 이전에는 교문에서 바리깡(이발기)을 들고 머리를 깎는다고 위협을 했죠. 실제로 머리에 고속도로 생긴 아이들도 있구요. 가장 큰 피해자는 질문하신 기자님이 아닐까 싶은데요? 학교에선 유명했는데(웃음) ‘머리끄댕이 사건’ 있잖아요.
 
승현 : 맞아요 저는 두발단속에 슬픈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곱슬머리 특성상 조금만 길러도 머리가 풍성(?)해 보이는 데. 머리가 길어보인다는 이유로 ‘머리끄댕이’를 잡히고 끌려가서 강제로 머리를 깎였죠. 그 때, 정말 제가 사람대접 못 받는 것 같아서 교실에서 학교 욕을 하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또, 두발 이외에 복장단속이 기억 나네요. 예전에 통바지, 쫄바지가 유행했었잖아요? 학교에선 바지를 수선해서 입으면 압수당했었죠. 게다가 학교 규정상 초여름인 5월까지 춘추복을 입어야하는데, 일찍 하복을 입거나 혹은 추워서 동복을 입으면 또 엉덩이를 맞거나 오리걸음을 해야했죠. 학생이 더우면, 하복을 입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아직도 이해가 안되네요.

은빈 : 저는 가장 나쁜 규제를 뽑으라면 소지품 검사를 꼽을 수 있어요. 제 기억에는 중학교 때, 핸드폰이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핸드폰 압수를 하라는 교육청의 공문이 왔었어요. 그래서 저흰 매일 학교에 가면, 소지품 검사를 맡아야 했어요. 처음엔 자진해서 핸드폰을 걷었지만, 나중엔 친구들이 안내니깐 강제로 가방을 뒤지기까지 하더라구요. 핸드폰을 압수당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갔지만, 솔직히, 매우 불쾌했어요. 또 여성들만의 그런 것(생리대)이 있잖아요. 수치스럽죠.  어떤 이유에서든 압수 혹은 수색하려면 경찰도 법원에서 영장을 가져오는데, 학교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막대하는 건지, 학교는 학생을 도대체 무엇으로 보는 걸까요?


혹시 교실의 모습이나 교육 방식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이 있나요?

명훈 : 저는 급훈이 생각이 나요. ‘공장가서 미싱 돌릴래, 대학가서 미팅할래?’나 ‘3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 얼굴이 바뀐다.’ 이런 건 한 번씩 보지 않나요? 급훈이 ‘학급의 교육목표로 정한 덕목’이라는 뜻인데, 교육목표가 전인격적인 교육은 고사하고 명문대 진학만을 위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돈 많이 버는 것)만을 추구하는 교육현실을 적나라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하게 만드네요.

은빈 : 또 교육청 글귀 중에 ‘우리의 교육은 민주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지성을 기른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웃음)기만 아닌가요? 교육사회가 우리들을 위해 고민이나 할까요? 교과부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였던 것을 본다면, 학생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맞게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문제만 이야기되지 우리들이 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잖아요. 고3 생활을 보면 거의 체육시간에 체육을 안해요. 문과면 과학시간에 실험 안해요. 이과면 사회시간에 고민을 안해요. 오직 영어단어 한 글자 더, 수학문제 한 문제 더, 이게 우리 교육의 방식이자 지향점이죠.




당신의 청소년 시기를 정의한다면?


명훈 :
청소년 시기의 키워드는 보호라고 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 사회가 우리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알겠는데, 허나 그것이 통제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죠. 청소년이 우리 사회에서 온전한 시민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해요. 미성년자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 나이로 우리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재단하고, 보호라는 이름으로 박탈하는 우리의 권리를 강제로 유예시키죠. 이 속에서 청소년들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네요.

은빈 : 오... 명훈! 저도 동의!



이젠 청소년 문제에서 '청소년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무엇이 문제일까? 왜 아직도 대책이 없는 것일까? 

최근 잇달아 발생하는 학생들의 자살사건, 폭력사건에 정부와 교육연구소는 자살 예방교육과 학교폭력 상담소 등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대처는 기자의 중학교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당시 기자의 중학교는 스쿨폴리스, 학교폭력 예방 시범학교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는 경찰관이 돌아다녔고 매주 월요일 7교시에는 자살과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죽고싶다’는 고민상담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해에는 심지어 학교 내에서 친구가 친구를 폭행해 죽인 사건이 있었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떤 사회에 있어도 주인이 되지 못한다

위 문장은 3명의 취중대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청소년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 실제로 기자에게 다녔던 중학교에서 경찰들이 학생들을 감시를 할 때도, 자살과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에도 학교는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 학생이 죽었을 때도 변변찮은 학교폭력 설문지 하나 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보호라는 이름 아래에서 학교에 더 많은 경찰관을 풀고 통제하며, 자살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만 주입시켰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왜 자살하고 폭력을 저지르는지 혹은 가출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번 기획은 이 사회의 청소년에 대한 결핍된 물음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청소년을 고민하기보다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했다. 단지 가해자를 더욱 세게 처벌하고, 청소년 상담센터 건립으로 끝나는 지금의 대처방식은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청소년이 마주한 사회의 문제를 놓치게 만든다. 이에 이번 기획은 지금 청소년기를 겪는 10대, 최근 겪었던 20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더 나아가 10대 20대가 꿈꾸는 참된 사회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링크] 기획 순서

-  청소년의 문제에서 ‘청소년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  나는 양아치입니다.

-  당신의 입시는 어땠나요?

-  청소년, 미성년의 딱지를 거부하다.

-  인권과 청소년이 꿈꾸는  사회를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