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노나라 사관이 쓴 역사서에 자신의 글을 덧붙여 <춘추(春秋)>를 지었다.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사필의 준엄한 논법을 비유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공자는 이 책으로 노나라 242년간의 사적에 대한 간결하게 사실을 적은 후에 선악을 논하고 대의명분을 밝혀 후세의 왕의 길을 가르치는 것으로 천하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후에 맹자가 “춘추가 등장한 후에 간신적자들이 떨었다”고 할 만큼 이 책엔 대의명분을 기초로 한 엄중한 역사 평가가 담겨 있다. 춘추에서 일컫는 대의명분은 춘추대의라 따로 불릴 정도로 큰 의미를 지녔다. 공자는 이를 바탕으로 대의명분이 있는 전쟁과 아닌 전쟁을 구별하여 달리 표기하였고 정통성이 있는 왕과 아닌 왕을 구별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에도 조금 의미가 변하긴 했지만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들의 뜻이 어떻든지 간에 세습으로 왕위를 계승하던 시대보다 유권자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는 이 시대에  대의명분은 그 빛을 발할 때가 더 많다. 대의명분은 유권자의 중요한 선택 기준 중 하나기 때문이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권주자든 예비경선후보든 대통령이 되려 하는 이는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 하는 이유인 대의명분을 경선이나 연설, 유세 등 여러 과정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가장 많은 유권자에게 선택된 후보의 대의명분이 가장 설득력이 있거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셈이다. 직선제로의 개헌 이후 대통령에 당선됐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당시의 후보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대의명분이 유권자들에게 와 닿았던 덕분이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손학규 전 대표가 대선출마 의사를 밝혔다. ⓒ 연합뉴스

 
슬로건은 자신의 대의명분을 손쉽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 전략 중 하나다. 대선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거나 경선출마를 선언한 대권주자들의 슬로건에 주목해야하는 건 이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장의 슬로건인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나 손학규 민주당 전대표의 ‘저녁 있는 삶’, 문재인 의원의 ‘우리나라 대통령’, 정세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빚 없는 사회’등이 모두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 하는 대의명분을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대선주자들의 슬로건이 관심 있게 다루어지고 평가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하지만 슬로건이 획기적이라 해서, 인상 깊다 해서 그것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큰 오산은 없다. 알맹이가 없는 슬로건은 껍데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호평을 받은 손 전대표의 슬로건 ‘저녁 있는 삶’이 그 의미를 지니려면 세계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이 솔깃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과 실존적인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임금보전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다른 대선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하고 어떤 법이 고쳐져야 할지, 경제민주화는 어떻게 이룰지, 지금은 그런 것들이 생략된 상태다. 공자는 춘추에서 대의명분에 입각해 객관적인 사실만을 역사로 기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선주자에게 객관적 사실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속빈 강정인 슬로건만 남는다면 이는 곧 대의명분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대선 슬로건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채택했다. ⓒ 연합뉴스


물론 대의명분이 있다고 해서 꼭 대통령이 되는 건 아니며 대의명분이 없다고 해서 대통령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문제는 괴로운 이들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대통령 대부분의 말년은 어두우며 전 계층, 전 지역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내세웠던 대의명분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이행하지 않아서다.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낙수효과를 대의명분으로 삼아 당선된 이 대통령 시대는 악화된 사회양극화와 천문학적 금액에 이르는 부채로 점철됐다. 그가 내세운 대의명분이 허울뿐인 슬로건이었던 탓이다. 이처럼 좋은 말만 써놓아서 말만 번지르르한 슬로건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결국 후보들의 몫이다. 슬로건 전쟁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책과 대안을 어서 내놓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