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동상이몽!
다양한 전공을 가진 20대들이 모인 고함20. 같은 주제를 보고도 전공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집니다. 하나의 키워드를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두명의 필진이 풀어내는, '동상이몽'입니다.

 
몸은 사탄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 기호학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는 서양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몸은 정신과 분리되어 정신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몸이 즐기는 모든 것, 섹스를 비롯하여 맛있는 것에 대한 탐욕, 시각적 즐거움 등은 억제해야 했다. 중세를 떠올릴 때 우리는 고딕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지만, 중세의 대부분을 장식한 것은 빛조차도 거의 비치지 않는 아라베스크 성당이었다. 시각적 즐거움도 죄였기 때문이다. 몸은 숭고한 정신을 방해하는 말썽꾸러기였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즐거운 것들은 몸을 통한 것들이다. ‘정신조차도 육체적 경험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주의자 흄의 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정신적 즐거움이라고 불리는 것들 역시 대부분 오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는 몸에 가해진 속박을 서서히 해체해 가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결국 육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육체는 ‘즐거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에서 벗어나는 패션의 역사

육체의 해방은 단순히 쾌락의 원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았다. 육체의 본래 기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분절되는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우리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우리의 몸이 평소에 허락받지 못한 것들, 방구를 크게 뀌거나 이상하게 걷는 것은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체 비례(이성)에 어긋난 몸과 이상적 얼굴에서 벗어난 이들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는 것도, 이성의 규칙에서 자유로운 몸만이 우리에게 해방감을 동반한 웃음,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몸은 기존의 규범에 반하는 방식으로 ‘즐거움’을 준다.

특히 패션이 그랬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의 ‘시스루룩’을 보고 토로하는 불편함처럼 사실 모든 ‘패션’은 처음부터 시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즐겁운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이 미니스커트에서 ‘매력’을 느끼기보다 ‘낯섬’을 느끼던 시대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던 신여성이 있었던 것은 미니스커트가 롱스커트보다 미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존에 허용되던 치마보다 더 짧았기 때문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옷을 뽑는 부질없는 경쟁을 벌인다고 생각해보자. 실용성, 사회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빅토리안 시대의 그 화려한 옷들이 꼽힐지도 모른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를 강조한 스타일은 어쩌면 현대의 옷보다도 더 육감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패션에서 벗어났다. 그 옷은 기존의 ‘규범’을, 몸에 가해진 ‘예절’과 ‘질서’를 뜻했기 때문이다. ‘벗어나는 것’만큼 패션이 추구해 온 것은 없었다. 바지를 입는 여성 그리고 현재의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는 남성 까지. 패션의 역사는 반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몸을 직관하는 시스루

남성의 복식은 대체로 전통적 스타일에서 크게 변모하지 않는 반면, 여성의 패션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어 온 것도 여성의 몸이 지나치게 규범화되어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어머니의 몸이고, 아내의 몸이었다. 여성의 몸은 행실, 예절, 정숙함이라는 단어 아래 더 철저히 통제 당해왔고, 근대 이후에는 그 모든 여성적 가치와 함께 사회 여성으로서의 남성성 역시 강요당해왔다. ‘사내 분위기를 흐리는 정숙하지 못한 옷’ 같은 것 말이다. 여성이 동료로써 존재하기 위해선, 쓸데없는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 남성적 외피를 입어야 했다.

시스루룩은 ‘속옷을 보여주고자 하는 옷’이 아니다. ‘속옷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범에서 탈피하는 옷이다. 시스루는 이러한 규범이 있지 않고서는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옷이다. 시스루룩은 많은 규범을 해체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존재할 때 잊어야 하는 ‘여성성’을 시스루룩은 드러낸다. 레이스나 주름이 많이 잡힌 옷에서 드러나는 가식적 여성성이 아니라, 진짜 ‘여성’. 규범에 의해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드러낸다. 그것도 절대 성적性的이어서는 안 되는 사회여성이나, 모성의 외피를 두르고 말이다.

시스루는 보여서는 안 되는 속옷이 드러나고, 공존할 수 없는 모성母性과 여체女體가 공존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몸, 여체, 사회 여성의 몸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것이 구분되기를 강요받아왔을 뿐이다. 이러한 구분이 스미는 옷, ‘시스루(see-through)’는 단순히 속옷을 투과해 보여줄 뿐 아니라(see-through), 여성의 본질을 꿰뚫는다. 병존을 허락받지 않은 것들의 충돌에서, 우리는 해방감과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헤프게 입을 수는 있지만, 당신들이 날 성추행할 순 없다"- 여성학

찌는 듯이 습한 더위가 한창인 6월 24일 중국 상하이, 시민의 발인 지하철에 기묘한 복장의 여성 두 명이 탑승했다. 둘 다 머리에는 히잡을 써서 눈만 빼꼼 내놓았는데, 한 명은 검은 옷으로 몸을 다 가렸고 한 명은 둥근 금속구로 양 가슴을 브래지어처럼 가렸다. 손에 든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헤프게 입을 수는 있지만, 당신들이 날 성추행할 순 없다”
“시원하길 바랄 뿐, 성추행범은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상하이 지하철 공식 웨이보(트위터와 비슷한 중국의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과 공지문에 항의하기 위해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밝혔다. 6월 20일, 상하이 지하철 공식 웨이보는 속옷이 비치는 검은색 시스루 원피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과 함께, “이렇게 입고도 성추행을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지하철에 변태들이 많고 다 잡아내기는 어려우니, 아가씨들, 자중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공지문을 올렸다. 이에 많은 여성들이 반발하며 사과를 요구했으나, 상하이 지하철은 그를 거부하고 공지문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1월, 캐나다 여성들의 분노를 샀던 경찰관 생귀네티의 발언과 꼭 거울로 비춰놓은 듯이 닮았다. 그는 토론토의 한 대학에서 안전 강의를 하면서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헤픈 여자(슬럿/slut)처럼 입지 말라”고 말했고, 이에 반발한 수천명의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슬럿워크’를 벌였다. 아무리 야한 옷,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성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물어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벌어진 시위였다. 많은 여성들이 속옷 차림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나타나, “강간당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강간하지 말라고 가르쳐라”, “내 옷은 yes가 아니다” 등등을 외치며 거리행진을 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어,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잡년행진’이라는 이름으로 퍼포먼스를 벌였고 올해도 역시 잡년행진 2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성폭력의 정의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근 또는 성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성적행위에는 신체접촉, 추행, 강제적 성행위, 음담패설, 외모에 대한 언급, 응시, 몸동작, 음란물 전시와 같은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여성의 노출이 심한 옷차림, 소위 ‘헤퍼보이는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남성의 성욕은 억제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본능, 충동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러한 믿음 아래 성범죄의 피해자는 ‘언제라도 분출될 수 있는 성적 충동’을 부추긴 ‘가해자’가 된다. 속옷과 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스루룩은 이러한 맥락에서 성추행을 유발하는 ‘피해자이지만 실은 가해자’의 도구로써,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범죄는 실상 여성의 노출이나 성적 개방성과는 관계없이, 남성 지배가 강하고 여성을 소유물로 간주하거나 남녀 사이 적대감이 강하고 사회적으로 폭력 사용이 빈번한 사회일수록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묻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언제라도 잠정적인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내면화하며 스스로를 통제한다. 실제로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소수일지라도,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하고, 낯선 환경에서 몸을 사리며, 옷차림을 정숙하게 하고, 일터에서 야근을 하거나 밤 늦게까지 활동을 할 때에도 남성들보다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제약은 일견 여성이 스스로 통제, 즉 ‘자중’하는 형태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압박을 통해 만들어진 공포를 통해 강요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스루룩을 입지 말라고 여성에게 권하는 것은 여성을 배려하는 충고가 아니다. 거기에 따라오는 “그렇게 입는 건 네가 그렇게 당해도 싸다는 뜻이고, 범죄에 대한 책임은 실상 너에게 있다”라는 이 말은 완벽한 협박이나 다름없다. 시스루룩은 몇 년 전만 해도 일반인 중에서는 거의 입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 들어서 많은 여성들이 입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에서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그러니까 ‘보호할 만한 여자(=헤프지 않은 여자)’가 입는 옷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아니 모든 사람은 그의 옷차림, 혹은 자신이 드러내는 외부적 지표에 관계없이 범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누가 범죄자들에게 옷차림을 탓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