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사탄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 기호학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는 서양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몸은 정신과 분리되어 정신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몸이 즐기는 모든 것, 섹스를 비롯하여 맛있는 것에 대한 탐욕, 시각적 즐거움 등은 억제해야 했다. 중세를 떠올릴 때 우리는 고딕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지만, 중세의 대부분을 장식한 것은 빛조차도 거의 비치지 않는 아라베스크 성당이었다. 시각적 즐거움도 죄였기 때문이다. 몸은 숭고한 정신을 방해하는 말썽꾸러기였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즐거운 것들은 몸을 통한 것들이다. ‘정신조차도 육체적 경험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주의자 흄의 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정신적 즐거움이라고 불리는 것들 역시 대부분 오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는 몸에 가해진 속박을 서서히 해체해 가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결국 육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육체는 ‘즐거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에서 벗어나는 패션의 역사
육체의 해방은 단순히 쾌락의 원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았다. 육체의 본래 기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분절되는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우리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우리의 몸이 평소에 허락받지 못한 것들, 방구를 크게 뀌거나 이상하게 걷는 것은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체 비례(이성)에 어긋난 몸과 이상적 얼굴에서 벗어난 이들만이 코미디언이 될 수 있는 것도, 이성의 규칙에서 자유로운 몸만이 우리에게 해방감을 동반한 웃음,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몸은 기존의 규범에 반하는 방식으로 ‘즐거움’을 준다.
특히 패션이 그랬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의 ‘시스루룩’을 보고 토로하는 불편함처럼 사실 모든 ‘패션’은 처음부터 시각적으로, 육체적으로 즐겁운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이 미니스커트에서 ‘매력’을 느끼기보다 ‘낯섬’을 느끼던 시대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던 신여성이 있었던 것은 미니스커트가 롱스커트보다 미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존에 허용되던 치마보다 더 짧았기 때문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옷을 뽑는 부질없는 경쟁을 벌인다고 생각해보자. 실용성, 사회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빅토리안 시대의 그 화려한 옷들이 꼽힐지도 모른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를 강조한 스타일은 어쩌면 현대의 옷보다도 더 육감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패션에서 벗어났다. 그 옷은 기존의 ‘규범’을, 몸에 가해진 ‘예절’과 ‘질서’를 뜻했기 때문이다. ‘벗어나는 것’만큼 패션이 추구해 온 것은 없었다. 바지를 입는 여성 그리고 현재의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는 남성 까지. 패션의 역사는 반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몸을 직관하는 시스루
남성의 복식은 대체로 전통적 스타일에서 크게 변모하지 않는 반면, 여성의 패션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어 온 것도 여성의 몸이 지나치게 규범화되어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어머니의 몸이고, 아내의 몸이었다. 여성의 몸은 행실, 예절, 정숙함이라는 단어 아래 더 철저히 통제 당해왔고, 근대 이후에는 그 모든 여성적 가치와 함께 사회 여성으로서의 남성성 역시 강요당해왔다. ‘사내 분위기를 흐리는 정숙하지 못한 옷’ 같은 것 말이다. 여성이 동료로써 존재하기 위해선, 쓸데없는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 남성적 외피를 입어야 했다.
시스루룩은 ‘속옷을 보여주고자 하는 옷’이 아니다. ‘속옷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범에서 탈피하는 옷이다. 시스루는 이러한 규범이 있지 않고서는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옷이다. 시스루룩은 많은 규범을 해체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존재할 때 잊어야 하는 ‘여성성’을 시스루룩은 드러낸다. 레이스나 주름이 많이 잡힌 옷에서 드러나는 가식적 여성성이 아니라, 진짜 ‘여성’. 규범에 의해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드러낸다. 그것도 절대 성적性的이어서는 안 되는 사회여성이나, 모성의 외피를 두르고 말이다.
시스루는 보여서는 안 되는 속옷이 드러나고, 공존할 수 없는 모성母性과 여체女體가 공존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몸, 여체, 사회 여성의 몸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것이 구분되기를 강요받아왔을 뿐이다. 이러한 구분이 스미는 옷, ‘시스루(see-through)’는 단순히 속옷을 투과해 보여줄 뿐 아니라(see-through), 여성의 본질을 꿰뚫는다. 병존을 허락받지 않은 것들의 충돌에서, 우리는 해방감과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찌는 듯이 습한 더위가 한창인 6월 24일 중국 상하이, 시민의 발인 지하철에 기묘한 복장의 여성 두 명이 탑승했다. 둘 다 머리에는 히잡을 써서 눈만 빼꼼 내놓았는데, 한 명은 검은 옷으로 몸을 다 가렸고 한 명은 둥근 금속구로 양 가슴을 브래지어처럼 가렸다. 손에 든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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