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이 지난 10일부터 협력사와의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갑’과 ‘을’이라는 단어 자체에 지위의 우열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대신 ‘갑’을 ‘백화점’으로, ‘을’을 ‘협력사’로 고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역시 모든 연구개발(R&D)사업 협약서 상에 표기된 ‘갑’, ‘을’이란 호칭을 개선하겠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최근 ‘라면 상무’, ‘조폭 우유’, ‘폭행 빵 회장’ 등을 통해 고질적인 갑을 관계로 인한 종기가 곪아 터지면서, ‘갑’의 위치에 있는 기업 및 기관들이 우선적으로 사태 수습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도 자체는 좋다. ‘갑’과 ‘을’은 영어로 따지면 ‘A’, ‘B’ 같은 단순한 의미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계약서에 쓰이며 상하 관계를 암시하는 단어가 된 지 오래다. 언어가 잠재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감안하면, ‘갑’, ‘을’이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쓰면서 은연중에 협력업체를 낮춰 보는 경향이 생김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타파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최근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는 ‘갑을 관계’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여, 기업 차원에서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긍정적인 신호다. 적어도 기업과 기관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아예 외면하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냥 기업들의 발빠른 조치를 좋게만 볼 수는 없다. 계약서의 ‘갑’과 ‘을’을 없애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쉬운 조치만 취하고 유야무야 넘어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업들의 이러한 대처에 대해 ‘본질을 벗어났다’, ‘꼼수일 뿐이다’ 등의 냉소적인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지금껏 기업들이 문제가 불거질 때만 봉합하고,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갑을 계약서’의 퇴출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사건을 봉합하기 위한 꼼수로 비춰질 수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우리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단지 ‘꼼수’라고 치부하긴 어렵다. 그러나 언어가 현실 자체를 바꾸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계약서에 있는 갑과 을을 없애거나 바꾼다고 해서 갑을 관계가 사라지진 않는다. 결국 의식의 변화가 실제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절대로 ‘갑을 계약서’ 퇴출 선에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갑’들의 인식 변화다. 협력업체, 하청업체 등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의 연이은 사건을 통해, 갑이 을을 인정사정없이 착취하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명확하게 드러났다. 언젠가 터질 고름이 터진 것이다. 고름이 터진 뒤에는 적절한 치유가 필요하다. 그 시작은 바로 갑이 솔선수범하여 수직적인 분위기를 수평적 분위기로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