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인터넷 뉴스를 통해 한남대학교 철학과의 폐지 소식을 접했다. 사실을 확인해보기 위해 한남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런데 철학과 폐지와 관련한 어떠한 공지도 찾을 수 없었다. 5월 초 배재대에서 발생한 비슷한 일이 떠올랐다. 배재대 학생들은 학과 구조조정이 논의 중이라는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접했다. 배재대 학생들은 대규모 교내 집회를 하는 등 구조조정에 반발했다. 전국적인 관심까지 이어지며 배재대의 구조조정 논의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이 줄어들고, 학생들이 학교 축제를 즐기는 동안 배재대 측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남대 교내에 걸린 철학과 폐지 반대 현수막


한남대의 구조조정은 배재대보다 훨씬 더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 교수들은 물론이고 대학평의원회까지 반대했는데도 구조조정을 밀어 붙였다. 5월 9일 한남대의 ‘직제 및 정원조정연구위원회’는 철학과의 폐과를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철학과 교수들은 ‘오호! 통제라! 기독교대학 한남대학교가 철학과를 폐지하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문과대학 교수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철학과의 폐지가 부당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남대 측은 교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5월 21일 ’기획위원회‘, 5월 28일 ’교무위원회‘를 거쳐 철학과의 폐과를 최종 결정한 것이다. 6월 4일 대학평의원회에서는 총원 11명 중 9명이 철학과의 폐과에 반대했다. 그 결과 구조조정안을 부결시켰다. 한남대 측은 대학평의원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철학과를 폐과했다.

대학 구조조정의 핵심적인 피해자인 한남대 학생들은 폐과 결정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폐과 소식을 통보받았을 뿐이다. 대부분의 한남대 학생은 학과 폐지 소식을 언론 기사를 통해 들었다. 때는 이미 5월 28일 ‘교무위원회’에서 폐과 결정이 난 후였다. 학생회의 요청으로 6월 10일에 공청회가 열리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고성철 부총장은 “구조조정을 시행하는데 있어 구조조정의 대상자와 논의할 필요는 없다.”며 “행정절차상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기말고사이자 종강 시즌이었다. 한남대 측이 일부로 종강 시즌에 구조조정을 진행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찌 됐든 많은 학생들이 구조조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철학과 폐지 결정 철회를 위한 기자회견


폐과가 확정된 상태였지만 한남대 철학과 학생들은 폐지 철회를 위해 시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6월 16일에는 철학과의 폐지를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서와 현수막을 붙였다. 이 때 한남대 철학과 폐지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가 결성됐다. 비대위는 6월 17일부터 1인 시위와 함께 온, 오프라인에서 철학과 폐지 반대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6월 23일에는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철학과 폐지 반대 집회를 열었다. 1인 시위는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계속 됐다. 하지만 한남대 측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비대위는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외쳤다. 구조조정 과정에 참여시켜주지 않으니 시위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허나 한남대 측은 비대위의 목소리마저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렸다.

6월 26일 비대위는 ‘철학의 죽음’ 퍼포먼스 및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 후에는 한남대 56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전국 대학교수 선교대회’ 행사장 앞에서 침묵시위를 펼쳤다. 당시 선교대회에는 전국에서 많은 대학 교수들이 찾아왔다. 철학과 근조 화환을 뒤에 둔 채 피켓을 들고 있는 비대위의 모습이 보이는 게 부끄러웠는지, 한남대 측은 비대위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철수를 할 수 없다고 맞서던 비대위는 결국 총장과의 면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총장과의 면담은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다. 양측의 입장은 너무나도 달랐다. 비대위는 철학과 폐지의 철회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한남대 측은 철학과 폐지를 인정한 뒤 후속 조치에 대한 논의를 하자는 식이었다. 한남대 측은 폐지 철회를 원하는 목소리를 여전히 무시한 것이다. 비대위는 이후에도 철학과 폐지의 철회를 위해 활동을 이어갔다. 한남대 측도 여전히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 열린 대학 구조조정 토론회에서 발제 중인 한남대 철학과 비대위


한남대 철학과 폐지의 흐름은 비민주적 대학 구조조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대학 구조조정이 취업률이란 잣대에 의존해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물론 문제다. 하지만 좀 더 일리 있는 잣대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진다 해도, 민주적인 절차는 필수적이다. 취업률을 잣대로 하는 소위 기업식 대학 구조조정의 방향성이 옳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학 구조조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건 학내 구성원들이다. 교수와 학생 등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인 절차는 대학 구조조정에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