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PC방을 방문한 20대 후반의 직장인 A씨는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A씨는 모 사의 유명한 FPS 게임인 ‘서든 어택’을 하기 위해 ‘불금’의 술 약속을 마다하고 막 PC방에 도착한 참이었다. 하지만 A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신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중, 고등학생들이 ‘생선’이니, ‘문상'이니, ‘어사’니 도통 알 수 없는 단어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 국어원이 2012년 실시한 ‘청소년 언어실태 언어의식 전국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초, 중, 고등학생)의 약 80% 정도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쪽지, 편지를 보낼 때 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10대들에게 은어를 빼고 대화를 하라고 한다면, 10명 중 8명은 당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말문이 막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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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은 이런 10대의 은어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유명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10대와 은어로 뉴스를 검색해보니 역시 비판적 논조의 기사가 대부분이다. 어느 드라마의 출연진들이 10대들의 은어에 ‘멘붕’ 했다며 은어에 대한 비판적 기사의 제목에 은어를 사용하는 자기분열적 기사부터, 암호 뺨치는 10대 은어(은어), 말이 안 통하는 사회 등등 대다수 언론은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야말로 맹목적 계도의 대상인 것이다.

바뀌고 있는 은어 공식. 예전과 달리 ‘언어의 경제성’이 강화돼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20대라면,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위 메신저계의 첨병 역할을 했던 ‘버디버디’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r랑ㅎㅏ│’(사랑해)‘, ’∈ł프ロどㄸБ(터프만땅 - 주. 대단히 터프하다는 뜻)‘, ’ユㄹ├│㉦ㅓʔ(그래서?)‘ 등의 소위 ’외계어‘라고 불리던 해괴한 은어들 또한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몇몇 국어 전문가들을 거의 패닉 상태까지 몰고 갔었던 이 외계어 문화는 어쩌면 지금 20대들에겐 하나의 추억이, 아니면 몇몇 어르신들에겐 세대 간의 혼란만 부추겼던 불쾌한 편린의 한 자락일지 모른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이런 문화는 쇠퇴하고, 조금씩 줄임말 문화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다. 어떤 예능프로그램의 유행어(‘안습’)에서 비롯된 줄임말 놀이가, 이제는 ‘김천(김밥천국)’, ‘생선(생일 선물)’, ‘버카충(버스 카드 충전)’ 등의 단어 축약부터,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등의 문장 축약 까지 사람들의 언어활동 전역에, 특히 예능과 유행에 민감한 10대들에게, 하나의 문화로써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엔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위와 같은 현상은 아마 경제성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는 원체 긴말을 좋아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정확도 문제와 더불어, 같은 말이라면 이왕에 짧게 표현하는 것이 더 많은 단어/문장들을 상호 간에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SNS 시스템의 활성화와 정보의 범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빨리, 많이 얘기하게끔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 동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지는 몰라도, 예전보단 더 언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는 과정이라 설명할 수도 있다. 기존의 외계어 문화가 특이하고, 예쁜 모양의 자, 모 형태에 천착하며 마치 서예의 21세기 형 변종 문화였다고 본다면, 현재의 줄임말 문화는 빠른 전달과 명확성이라는 언어의 본질적 특징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가는 중인 것이다. 이를 외계어의 ‘진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고, 그럼에도 기존의 관점대로 ‘국어 파괴 현상’이라 지칭해도 좋다. 다만, 10대들의 은어 문화를 여전히 파괴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다수 언론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이런 현상들이 10대에게만 국한되고 있는지는 조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법률, 의학 등의 전문 분야 단어들도 알아듣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
10대들의 은어 문화만을 지적한다는 것은 자칫 세대, 계급적 폭력으로 해석 될 수도

혹시 ‘Legalese'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체할 만 적확한 한국어는 없지만, 해석하자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난해한 법률용어‘ 정도가 된다. ’해태(게을리하다)‘ 하였느니, ’준용(유사하게 적용한다)‘하였느니, ’양하(내리다)‘하였느니 따위의 어려운 한자어들이 그에 해당한다. 의학 용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의학계 용어들은 아예 읽기조차 버거운 경우가 많다. 대다수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이런 난해한 법률, 의학 용어들이 결국 자신들의 전문, 계급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언어의 고의적 사용으로 교묘히 경계선을 만들어 하나의 계급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서양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야 했던 의학의 태생적 특성이나, 해방 이후 조악하게 번역된 일본의 법률에서 많은 참고를 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당시 실정을 고려해보면, 지금과 같이 난해한 용어들이 범람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진 않다.

난해한 용어의 사용이나, 은어의 사용 모두 국어 파괴라는 본질적인 면에선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한 쪽만 계속 샌드백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 용어의 순화 필요성도 꾸준히 지적돼 왔던 문제고 실천도 이뤄지고 있으나, 그 비판 강도는 10대의 은어 문화에 비하면 약한 수준이었다. 또한 이는 자칫 만만한 10대을 대상으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세대, 계급적 폭력으로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균형 있는 문제의식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적정한 순화는 필요해……, 무조건 배척하기 보단 서로 간의 이해가 있어야

세대, 집단 간의 보다 활발한 소통을 위해서라도, 기존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줄임말 문화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또한 줄임말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초성화 되어 알 수 없는 단어들(ㅍㅍㅅㅅ=폭풍설사, ㅈㄱㄴ=제목이 곧 내용, 내용이 없다는 뜻)이나, 아예 그 뜻 자체가 심각하게 변질되어져 버린(민주화 등)용어들도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때리기’에만 천착하고, 무조건적인 계도의 대상으로 10대의 은어 문화를 바라본다면 결국은 세대, 계급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 어떠한 건설적 결과도 도출할 수 없다. 전문 용어가 도입 되어진 사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듯이, 10대의 은어 문화 또한 무엇보다 다방면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해가 되면 그제야 비로소 문제를 풀기 위한 진짜 대화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