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

과거 KTF의 광고 중 육군사관학교의 여생도를 소재로 만들어졌던 캠페인의 카피.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는 당연히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를 근거로 사람을 구분 짓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보면 상식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다. 언제나 차이에 대한 인식은 그 대상물을 우열 관계 속으로 편입시키고, 이러한 우열 가름은 차별을 낳는다. KTF의 광고가 가져왔던 센세이션과는 별개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보편적 양태로 자리하고 있다.



▲ 큰 이슈가 되었던 KTF의 광고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 편
(출처 :
http://blog.naver.com/whlovese?Redirect=Log&logNo=140102715777&vid=0)


우열, 서열, 차별.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단어들을 가장 격렬하게 체험하게 되는 시기는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고3 시절이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들과 학과들을 줄 세워 놓은 소위 ‘배치표’는 한국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 주는 서글픈 상징물이다. 대학 지원 때부터 자신의 성적을 기준으로 배치표 속에 자신을 가둬버리는 보통 영혼들은 죽을 때까지 그 배치표에 의해 결정된 개인의 가격표를 떼어낼 수가 없다. 학과 특성화다 뭐다 말은 많아도 여전히 대학, 학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매우 선형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보이게, 보이지 않게 서로에게 차별을 느끼고, 차별을 만들어 간다. 학벌로 인해 20대들이 겪고 있는 차별의 사례들을 모아서 정리, 분석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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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평등은 개뿔, 여전히 골품제인 우리 사회

동국대 사회학과 03학번 졸업생인 김한나(가명) 씨는 현재 근무 중인 직장에 출신 학교, 학과에 따른 차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보통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차별은 아니지만,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벌에 따라 개인들이 구분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재능대 정보통신학과 07학번 졸업생인 정예현(가명) 씨의 경우는 전문대 출신이다 보니 학벌로 인해 느꼈던 차별감이 더하다. 전문대 출신이라는 무시, 전문대는 꼴통이라는 선입견이 준 고통은 슬프게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열등감, 피해 의식일 뿐이라고? 글쎄 그렇다면, 학벌을 따지는 문화가 대세인 사회에서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만 하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채용, 승진 시에 학벌에 따라 자격을 부여하는 등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차별의 현장도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04학번 졸업생인 박인우(가명) 씨가 근무하고 있는 A 기업은 채용 시 일부 상위권 대학에 한해서만 채용설명회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는 “채용설명회에서는 일반 채용공고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고급 사내정보나 입사를 위한 팁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참가자에 한해 서류전형 가산점이 제공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상위권 대학에서만 이를 실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타 대학 재학생의 기회를 제한한다.”고 언급했다. 숙명여대 관현악과 06학번인 한예림(가명) 씨는 ”음악하면 돈 많이 벌 텐데 굳이 이걸 왜 하나, 음악이나 다시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면접관들 때문에 기분이 많이 나쁘다.”며 면접 상황에서 음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했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래, 너 팔뚝 굵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기업이나 대학이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차별도 상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차별 대우들은 더 상처다. 호서대 컴퓨터공학과 09학번 하형규(가명) 씨는 “주변 사람들이 그 학교는 4년제 학교 맞냐는 둥 무시하는 어투로 물어본다.”며 불만을 표했다. 더욱 심한 경우도 있다. 경인여대 영상방송정보전공 08학번인 오혜나(가명) 씨는 “자기소개 때 전문대를 다닌다고 말하면 주위의 분위기가 갑자기 안 좋아진다.”고 했다. 서울여대 생명환경공학과 08학번인 나지혜(가명) 씨는 “영어스터디를 했는데 내 학벌을 알지 못했을 때와 알았을 때 다른 스터디원들의 태도가 너무 달라졌다. 학교, 학과를 밝힌 이후부터는 더 이상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혀 학벌과는 관계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차별적 발언들은 매우 쉽게 튀어나온다.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10학번 안정현(가명) 씨는 “성신여대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갔는데, 옷 가게 점원이 나와 친구의 학교를 묻더니 나와 내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참, 황당하다. 서울산업대 식품공학과 07학번 이소라(가명) 씨는 “아는 분이 동생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너희 언니는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뭐하려고 시험공부를 하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말했다. 또 다시, 황당하다. 그 분은 항상 1등만 하고 사셨나 보다.


차별의 피해자,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 그래도 너보다는 나은 나.

학벌로 인해 이렇게 많은 차별을 느끼고, 유사한 발언에 대해 알레르기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대학생들. 하지만, 문제는 이들조차 사실 선형적, 서열적인 학벌 구조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10학번 한은솔(가명) 씨는 “수능을 잘 봐서 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수시에 붙어버려 서강대에 왔다. 12년 동안 SKY만 보고 달렸는데 인생의 패배자가 된 느낌이다.”라며 학벌로 인해 내면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10학번 안정현(가명) 씨의 경우에도 배치표 상의 위치 때문에 타 대학 학생들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말하면서도, “소신에 따라 지원한 거고, 배치표보다 입결도 훨씬 높은데 짜증나더라구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남이 하는 차별적 발언에는 예민하지만, 스스로 뱉는 차별적 발언에는 무뎌졌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입시배치표는 우리 사회의 선형적인 학벌 인식의 상징이자 재생산 도구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strife82?Redirect=Log&logNo=400578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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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주의, 그로 인한 차별은 과연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필연인가. 고쳐질 수 없는 문제인가. 너무나도 무뎌진 사회 앞에서 또 한 번 필자는 고개를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풀 수 없을 만큼 엉켜버린 실타래를 눈앞에 둔 기분이라서. 희망? 그것은 너무도 멀리에만 보이지만. 모두 다시 한 번 반성해보기를 권한다. 스스로부터, 얼마나 학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