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이 불발로 끝나고, 사람들은 마치 습관처럼 한국 작가가 '이번에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던 이유를 고민하고 있다. 가장 많이 들려오는 것은 번역에 대한 지적이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번역으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어요!” 정말 번역이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번역으로 한국문학의 매력을 표현할 수 없다는 류의 투정이 통하는 것은 한국문학의 매력이 미학적인 것에만 그칠 때의 이야기다. 노벨문학상의 선정은 '언어의 아름다움'보다 '시대 정신과 사회적 공헌'에 근거한다. 그런 식으로 번역을 문제시하는 것은 상의 본질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번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측면이다. 한국문학의 번역은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에 속한 다른 나라들에 역시 뒤처지고 있다. 상업출판사가 출간한 번역 작품 단행본 숫자, 영어권 언론에서 리뷰를 실은 번역 작품 숫자, 번역 작품이 수상한 문학상 숫자, 해외 지원기관이 수여한 번역지원금 숫자, 한국소설 번역가와 소설가에게 수여된 레지던트 과정 숫자라는 지수를 살펴보면 차이는 더욱 확연하다. 한국어를 완벽히 외국어로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벗어나, 그 양과 질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문학 수출이 가장 활발하다고 여겨지는 일본에서도 상황은 나을 것이 없다. “신쥬쿠 기노쿠니야 서점에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문학의 서가가 한 서가의 한 단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오랜만에 같은 서가 앞에 서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문학’의 서가가, 한 단이 아니라, 두 대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싶어서 그 서가에 가서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한류 드라마에 관한 서적들이었습니다. 원래 있었던 ‘협의’의 한국문학은 역시 한 서가의 한두단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무사시대학의 와타나베 나오키 준교수가 소개한 경험이다.

한국문학이 세계시장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소설가가 없다는 점이다. 스페인 일간신문 '엘 문도(El Mundo)'는 2007년 2월자 기사에서 ”일본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도 없고, 인도처럼 영국에서 밀어주는 작가도 없으며, 중국의 경우처럼 거물급도 없다.“고 적었다. 1980년대 한국문학이 영어권 국가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로, 30년간 한국문학의 인지도는 굉장히 낮게 유지 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한국의 ‘거물급’ 작가를 세계에 선보이고, 최종적으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겠다는 구호 아래 일종의 ‘노벨문학상 수상 프로젝트’가 태어났다. 한국문학의 번역을 전담하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여기에 2009년에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수상에 대한 집착 역시 조금씩 과열되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난 오늘날엔 “노벨문학상 수상 불발, 고은 시인 내년을 기약…” 같은 제목으로 언론의 '김칫국 마시기'식 보도마저 시작되었다. 독자와 작가, 언론, 정부, 한국의 모두가 온통 “한국은 언제나 되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에 매달려있다. 시인 고은이나 소설가 황석영이라는 개인의 이름에 가려, 어느새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본질은 잊혀진 것만 같다.

초기에 단순 지원을 받아 근근히 진행되었던 번역 작업이 한국문학번역원의 설립으로 보다 전문적이 된 것은 과거에 비하면 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번역원 내에서도 번역 작품 선정기준의 경직성이나, 기계적으로 매뉴얼화된 번역교육 등의 추가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어떠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지를 재고, 아쉬워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덜 투자하고, 한국문학 번역을 활성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국문학을 해외에 알리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