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외부세력'이라는 유령이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나타났던 이 외부세력은 이제 밀양에 등장했다. 보수언론은 연일 ‘외부세력’이 밀양에서 주민간의 갈등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밀양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반대 주민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부세력은 당장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외부세력이란 사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있지 않은 사람이다. 밀양 송전탑 문제의 경우 밀양 주민과 한국전력은 ‘당사자'가 되며 이 둘을 제외한 현장의 환경운동가, 야당정치인, 학생은 ‘외부세력'으로 간주된다. 경남도지사와 주요일간지에서부터 현장의 경찰에 이르기까지 “외부세력은 밀양에서 손을 떼라”는 주장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문제의 중심에 그분이 계신다


이렇게 널리 사용되는 것과는 별개로 외부세력이라는 프레임은 모순적이다. 이미 이 단어를 언급하는 사람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송전탑 건설에 대한 찬성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당사자인 한국전력과 밀양 주민의 합의로 송전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 가운데 정작 한국전력과 밀양 주민은 없다. 현장에서 공사를 저지하는 ‘외부세력'의 행동이 옳지 않다면 공사의 조속한진행을 요구하며 ‘외부세력’을 비난하는 여론 또한 옳지 않다. 

‘외부세력’의 배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호소하는 곳은 당사자가 아니라 또 다른 외부세력에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발표한 대 도민 호소문의 내용은 정작 밀양 주민의 삶과는 비켜나있다. 신문지면을 채우는 전력난, 나노산업단지, 국익과 같은 단어가 수렴하는 곳은 아니러니하게도 송전탑 바로 아래 살고있는 '당사자'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 

외부세력을 언급하는 주장은 알맹이가 없다. 외부세력을 언급하는 사람은 당사자가 아닐뿐더러 그들이 설득하려는 대상 또한 당사자와는 거리가 멀다. ‘외부세력’을 비난하는 동시에 ‘외부세력’을 소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밀양 문제에서 당사자는 누구이고 외부세력은 누구인가? 한국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이제 밀양에서 나타난 외부세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당사자'와 ‘외부세력'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이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원리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정치의 기본 원리는 갈등이 끊임없이 사회화되는 과정에 있다. 갈등의 범위는 끊임없이 재조정되기 때문에 절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당사자와 외부세력이란 이분법적인 프레임은 존재할 수 없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모든 정치적 갈등은 소수의 당사자와 다수의 구경꾼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구경꾼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갈등은 구경꾼 사이로 쉽게 전염되는데다 구경꾼의 규모가 당사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구경꾼의의 개입이 이뤄지면 갈등의 본질, 힘의 균형관계를 완전히 변화시켜 버리곤 한다.

정확히 구분되는 두 집단인 ‘당사자'와 ‘외부세력'과는 달리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는 모델은 더 역동적이다. 현실의 정치를 더 잘 표현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노인연금 문제를 둘러싼 정당간의 갈등부터 성범죄자에게 더 가혹한 형벌을 주문하는 인터넷 여론까지 현실의 정치공간에서 이러한 역동성을 찾아보기란 어려운일이 아니다. 노인기초연금 문제가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수준이 성범죄자와 피해자만의 문제에서 머무르지 않듯이 밀양 송전탑도 자연스럽게 갈등이 구경꾼 사이로 전염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사적 문제가 사회화되는 그 과정에 있다.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 자유로운 언론, 매일 벌어지는 시위 모두가 사적 문제를 사회화하는 일련의 정치적 과정들이다.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나눈 여러 이야기는 사적 갈등이 사회화되는 가장 흔한 모습이다. 모든 문제가 단지 당사자간의 합의로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그럴듯해 보일진 몰라도 우리가 실제 살고있는 세상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당사자간의 합의가 모든 결정에 최우선한다고 믿는다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굳이 6자회담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북한측 주장대로 '우리민족끼리' 모든 일을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바보같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어떤 종류의 애매모호한 자결주의를 지지하며 ‘외부세력'을 비난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논리적 모순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셈이다. ‘외부세력'은 현실 정치를 왜곡하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진짜 외부세력'이 존재한다면 그는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밀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외국의 어떤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은 합리적 보수주의자를 위한 글이다. 자신을 보수주의자 이전에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도출된 판단을 정당화하기보다 이제 문제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밀양에 송전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밀양에 송전탑이 지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밀양 문제는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다. 밀양의 산야를 가로지르는 765kV의 초고압 송전탑이 필요한 이유는 전기를 생산하는 곳과 전기를 소비하는 곳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해안가에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이 전기를 수도권의 주택과 공장, 사무실로 보내기 위해 끝없이 이어지는 송전탑을 건설한다. 선진국의 에너지 정책이 대체에너지 개발로 화석연료와 원자력발전의 의존률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지금, 한국은 더 많은 전기를 더 싸게 생산해서 더 많이 사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밀양에 지어지고 있는 송전탑이다. 

바로 어제, 원전 비율을 기존 40%에서 22~29%로 축소하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초안이 공개됐다.국가에너지기본계획은 5년에 한 번씩 민관이 모여 향후 20년의 에너지정책을 결정하는 국가 최상위 에너지 결정기구다. 노후원전의 폐쇄와 건설중이거나 건설예정인 원전의 축소가 예상된다.

지금 밀양에 모인 사람들과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구경꾼'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에너지정책의 타당성에 물음표를 던지는 중이다. 아직도 밀양에 송전탑이 건설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외부세력’이라는 허상을 탓하기보다 먼저 이 문제에 답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