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 전날 10대 여 재수생 투신자살”  이는 어쩌면 개인의 문제다.

12만 7635명 (2014 대학수학능력시험 재수생 이상 지원자 수) 이는 1년 이상을 ‘뒤처진’ 13만 명의 문제다.

2013 전국 대학진학률 70.7% 아니,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29.3%의 문제다.

국립서울대학교 입학 정원 3096명 국립서울대학교 입학 정원을 제외한 나머지의 문제다.

국립서울대학교 2012년 의과대학 정원 95명 이는 의사로서의 앞길이 창창한 95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문제다.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대학에 들어가지도 않은 사람이 왜 학벌주의를 이야기해?” 혹은 “네가 공부 못해서 서울대 못 간 걸 왜 사회 탓을 해?”라는 말을 반박할 겨를도 없이, 대한민국의 학벌주의는 빠른 속도로 폐허를 향해 달리고 있다. 승자는 자신보다 더 높이 있는 다른 승자를 찾아내고, 그 순간 패자가 돼버리는 한편, '학벌주의'라는 사상을 내면화한다. 당신은 절대적 승자인가?

고함20에서는 양반과 상놈이 쓰던 갓처럼 가시적으로 서열화 된 대학잠바(일명 ‘과잠’), 명문대생만 할 수 있다던 과외 아르바이트, 한국 교육의 ‘최고 선(善)’이라는 국립서울대학교, 대학생이 아닌 20대의 학벌주의로 나눠 2000년 초중반 활발히 이야기됐던 학벌 사회라는 담론을 넘어 2013년의 학벌주의를 재조명한다. ‘어쩔 수 없다’면 그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하기 위해서. 


“알바, 그만둬야겠어.” 동생이 엄마에게 말했다. 동생이 알바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동생의 친구가 말하길, 과외알바는 다른 알바노동처럼 ‘장시간’, ‘쉼 없이’, ‘일어서서’, ‘개처럼’ 일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고소득'이다. 동생 친구의 말은 편의점을 비롯해 대부분 학생들의 알바노동을 ‘개처럼’ 하고 있다는 선언이 되어버렸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많은 대학생은 편의점 알바가 아니라, 과외 알바를 선호한다. 다만 할 수가 없다. 친구의 말처럼 ‘구할 수만 있다면’ 할 테지만, 과외를 구하기가 어디 쉽던가.


과외 알바를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부모가 자녀를 맡기고 싶을 ‘학벌’을 소유해야 하며, 자신의 학벌을 소개해줄 ‘인맥’이 필요하다. 학벌과 인맥이라는 기본을 갖추지 않은 이에게 과외알바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맥이라는 것도 자신의 학교 친구 및 선후배의 소개 또는 부모의 지인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학벌의 범주 안에 있다. 결국 ‘장시간을 쉼 없이 일어서서 개처럼’ 일하지 않고, 손님에게 욕을 한 사발 얻어먹고 싶지 않다면, 부모들이 탐낼만한 학벌을 가지고 과외알바를 해야 한다.

현주(23, 공주대)는 과외알바에 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현주는 수도권도 아니고 지방 국립대를 다니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알바의 폭은 넓지 않다고 말한다. 하물며 과외알바는 밤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4년을 다니면서 과외알바 하는 주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영어영문학과를 다닌다는 후배 한 명이 전부였다. 일단 지방은 과외의 수요자인 고등학생 수가 너무 적다." 현주의 말이다.

"우리가 과외를 할 수는 있어?" 수도권에 소재한 사립대학을 다니는 윤지(22, 가천대)는 과외알바에 대한 질문을 듣기도 전에 잘라 말한다. 윤지는 과외알바란 '잘난 놈'들이 하는 '꿀 알바'라고 정의한다. "해외에서 유명 대학을 다닌 지인이 있다. 그 사람은 그 잘난 학벌 덕분에 한 달에 수 백만 원을 벌었다. 그 사람이 내게 말하길, 중요한 건 학생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학벌을 갖추고 부모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는 것이 핵심이라고 하더라.“

서울 소재의 '비명문대'에 다니는 호준(22, 한성대)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과외알바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대학을 입학한 순간부터 입대하는 순간까지 결혼 예식장에서 주말마다 일했다. 하루 기본 10시간을 일했고, 예식이 많은 날에는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예식장에서 접시를 날랐다. 알바가 끝나고는 하루 종일 숙였다 폈다 반복했던 허리를 감싸 쥐고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고 해서 누가 과외알바를 맡겨주나.”
 
수도권에 소재한 대학에 다니는 재한(23, 대진대)은 입학했을 때 과외알바를 한다는 선배가 막연하게 부러웠다고 말한다. “어떻게 명문대도 아니고, 지방이나 다름없는 수도권 대학을 다니면서 과외를 하는지 궁금했다. 부모들은 토익 900점을 받을 수 있는 지방대 학생보다, 토익 점수와 무관하게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자녀의 과외선생으로 두고 싶어 한다." 윤지도 말한다. "내가 부모라고 해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에 재학하는 학생에게 내 자녀를 맡길 것 같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아인슈타인도 과외알바를 하기 위해 신문에 공고를 냈었다.

천하의 아인슈타인이라도 한국에서 과외알바를 쉽게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에서 몇 번째 대학이죠?



‘비명문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자신의 학벌이 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외알바는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여긴다. 학벌이라는 신(新)계급사회의 기준에 의해, 스스로 학벌사회 하위 계층이라고 여긴다. 그들에게 과외란 상위계층인 명문대 출신들의 전유물이다. 그렇다면 과외알바를 하는 대학생의 사정은 다를까. 답은 그렇게 간편하지 않다. 과외알바를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학벌’은 걸림돌이다.

대학 생활을 위한 돈은 필요한데, '힘든' 알바를 꺼리는 많은 학생들은 과외알바 시장으로 뛰어든다. 과거의 과외알바 시장은 그런 학생들의 공급을 적절히 유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과외알바 시장은 명백히 공급과잉, 경쟁과열로 과외알바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피로를 누적한다. 'SKY'라는 대표적인 명문대 타이틀만 있으면 과외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것은 과거의 말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 SKY라는 대학 '간판'에 어느 정도의 어학연수, 토익·토플과 같은 어학시험에서의 고득점 등으로 자신을 부가설명할 수 있어야만 부모들의 눈길을 끌 수 있다.

과외 전단지는 과외알바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불안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지표다. 이제 단순 어학연수가 아니라, 해외에서 장기체류 또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거주하는 이들이 과외시장에 참여하게 됐다. 이제 '고소득, 꿀 알바'의 과외를 위해서는 한국의 명문대라는 간판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존의 학벌이라는 간판은 자신의 신분과 같이 '100% 보장'해야 한다. 여기에 5-10년의 과외 경력을 추가로 '증명'해야 하며. 기타 어학시험 점수 및 자격증을 '공개'해야 하고, 무료로 학생에게 과외를 '시범'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과외알바의 문을 겨우 비집고 들어설 수 있다.

과외알바 이력서는 취업준비생의 이력서를 방불케 한다.


끝이 아니다. 공급이 포화된 과외알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전문가 집단에 들어가서, 중개 수수료를 떼어주면서 과외알바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외 중개업체는 명문대라는 학벌 간판과 그들의 경력을 홍보해주는 대가로 상당한 수수료를 취득한다. 물론 학생들은 이런 중개업체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과외를 시작한다고 고난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지도 않는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명문대라는 학벌 또는 자신보다 '대단한' 학벌을 지닌 과외알바 희망자가 넘쳐 과외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단순하게 학교 간판, 즉 학벌만으로 과외알바를 하는 시대는 끝났다. 과외알바를 위해서는 학벌 이상의 학벌이 필요하다. 과외알바를 위한 학생들 사이에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기존의 학교라는 간판에 새 패인트로 덧칠을 하는, 학벌 위의 학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과외알바에 이미 참여한 학생들은 언제나 '학벌'이라는 두 글자를 유념할 수밖에 없다.

과외알바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은 학벌주의가 학생들을 짓누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외알바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지방대생, 과외알바가 구해지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학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는 학생이나 과외알바를 하기 위해 학교 이름이라는 간판 위에 기타 경력까지 세세하게 적어내야 하는 경쟁 속에 내몰린 학생들 모두 마찬가지다. 학벌주의 안에서, 모두가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고,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막해한다. 누구 한 명 행복한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