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씨는 취미활동을 하며 알게 된 남자 3명과 여자 2명으로 구성된 무리에 속해있다. 그 중 B씨보다 6살이 많은 남자 C씨는 B씨가 가고 싶어 하는 직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C씨는 자소서를 봐준다거나 팁을 알려주겠다는 이유로 B씨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C씨는 챙겨주고 싶은 동생이라 말했고 C씨에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도 있었던 터라 B씨는 이성적 마음이 아닌 인간적인 고마움으로 C씨를 대했다. 그런데 C씨가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가끔 도를 지나친 발언과 행동을 하자 B씨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 C씨가 장난을 치면서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거나 ‘넌 치마만 입어라, 그게 제일 예쁘다’ 등의 발언을 한 것.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얘길 하면 ‘그런 뜻이 아니라 장난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A씨는 커피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동료 직원에게 성적 발언을 들었다. 꽤 많은 손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은 A씨에게 모든 손님들이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A씨, 오늘 옷이 너무 야한 것 아니야?”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됨을 느낀 A씨는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동료 직원은 이후에도 2번 가량 같은 이야기를 했다. A씨는 “내가 입은 옷은 평범한 치마였을 뿐이었다. 또 설령 짧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그런 발언을 공개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건 잘못된 것 아닌가. 큰 수치심을 느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위의 두 사례는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법적으로 성희롱이라 규정하기 힘든 ‘애매한 성희롱’이다. 우리는 이를 법적 테두리엔 포함되지 않지만, 그 변두리에 존재하는 ‘사회적 성희롱’이라 명명한다. 사회적 성희롱은 두 사람 간 명확한 상하 권력관계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며, 피해자가 인사상의 불이익 등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또한 설령 비가시적인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규정상 '성적 굴욕감, 혐오감'이라는 것이 평균적인 시각에서도 인정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법은 일상적인 많은 성희롱 문제를 감싸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 상황에선 성적 희화화를 하는 가해자와 수치심을 느끼는 피해자가 존재한다. "나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애매하다’라는 특징 때문이다. 가해자의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는 한 마디면 피해자는 졸지에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특히 불이익이 분명하지 않아 단체 내에서의 자체적 해결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애매한 사회적 성희롱은 더욱 문제가 된다. 누군가가 나서서 사건을 말하기도 힘들뿐더러, 말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덮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결과를 얻고,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은 채 또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사회적 성희롱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여길 수 없는 이유다.


법적 테두리 변두리에 있는 사회적 성희롱‥ 어떻게 다뤄야 하나?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법적 영역을 확대하는 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법적인 성희롱이든 사회적 성희롱이든 단순한 법적인 제재만으론 성희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정하경주 활동가는 “법은 최소한의 장치일뿐더러 법을 확장한다고 해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성폭력을 뿌리 뽑을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해결책이란 무엇일까. 핵심은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이다. 특히 법적인 정당성을 얻기 힘든 사회적 성희롱의 경우엔 이런 열린 공론장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회적 성희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해자가 이런 말을 해도 허용이 될 것이라는 문화적인 인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대 담배녀’ 사건처럼 제3자가 보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행위가 피해자에 의해 성희롱으로 여겨지는 사례도 있다. 한 쪽이 무조건 가해자고 다른 한 쪽은 무조건 피해자라는 형식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당시 상황의 맥락과 발언의 의미를 서로 공유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분위기다.


정하 활동가는 성희롱의 소지가 있는 발언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인 문화를 바꿔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공동체 내에서 가해자는 왜 이런 발언을 했고, 이 얘기를 들은 피해자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공동체 내에서 얘기할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커다란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린 공론장을 통해서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폐쇄적인 문화를 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각 구성원들의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어찌 보면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 혹자는 법으로 규정하면 빠르고 쉬운 일을 뭘 그렇게 돌아가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법은 해당 가해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뿐이라는 점이다. 성희롱을 쉬쉬하는 문화, 피해자가 겪는 감정을 예민함으로 치부해버리는 문화를 함께 형성한 공동체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모두 가해자에게 전가해버린다.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성문제는 가해자 한 명을 처단하는 것으로 절대 뿌리 뽑혀지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성문제에 대해 가해자든, 피해자든, 제3자든 구성원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자세가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