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 Aggravation(도발)의 속어로 게임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다. 게임 내에서의 도발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에게 적의를 갖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자극적이거나 논란이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끄는 것을  "어그로 끈다"고 지칭한다.

고함20은 어그로 20 연재를 통해, 논란이 될 만한 주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론에 정면으로 반하는 목소리도 주저없이 내겠다. 누구도 쉽사리 말 못할 민감한 문제도 과감하게 다루겠다
. 악플을 기대한다.

서울 지하철 2호선·4호선 환승역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에스컬레이터 벽에는 “치마는 가려주세요"라는 문구가 써 있다. 치마를 입은 사람이 앞에 서 있고, 카메라를 든 사람이 아래에서 마치 치마 속을 촬영하는 듯한 그림과 함께다. 치마를 입은 사람을 '몰카' 범죄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뉘앙스다. 문구의 의도는 언뜻 선해 보이지만, 마치 치마를 입으면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공식이 자동 성립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서울지하철이 걱정해야 할 정도로 치마는 위험한 옷차림일까?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 아래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들이 당국의 골칫거리라면, 확실히 지하철 역사 내 '도촬' 범죄는 증가 추세다. 몰래카메라 성범죄 발생 건수는 2009년부터 807건(검거인원 716명)에서 2010년 1134건(1051명), 2011년 1523건(1343명), 2012년 2400건(1816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작년 2013년도 8월말 기준으로는 2766건(1816명)의 몰래카메라 촬영 성범죄가 발생했다.

ⓒ 지하철 역사 내 에스컬레이터 라인 벽에 붙은 그림.


왜곡된 통념 집약된 “치마는 가려주세요”

그렇다고 몰래카메라 성범죄의 증가수치가 치마를 가려야 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에스컬레이터 벽 도식에 생략된 부분은 이렇다. ‘당신의 치마 속을 누군가 촬영할 수 있으니 치마는 가려주세요’. 몰래카메라 범죄는 피해자가 미리 방지해야 하는, 예방이 필요한 성격으로 변모한다. 성범죄 대처방안과 관련해 피해자의 몸가짐이나 옷차림 및 태도 등을 지적하는 기존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치마를 입은 이들 중 상당수는 이 문구를 보면 옷차림을 신경 쓰게 되고, 치마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그러나 치마가 아니라 짧은 바지여도 마찬가지다. 아니 앞에 선 사람이 치마보다 더 노출이 있는 수영복이나 그 외 웨딩드레스, 인형탈, 비닐 옷 등등 무엇을 입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타인의 신체를 촬영해도 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문구는 치마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진짜 '범죄자'를 겨냥해야 옳다. 어떤 범죄가 사람들의 예방으로 극복된다면, 왜 지하철 역사 내 성범죄를 비롯한 각종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가? 문구는 '타인의 신체를 촬영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런 곳에 쓰라고 있는 카메라가 아닙니다'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백 번 양보해 범죄예방 차원에서 치마를 가린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마치 뒤에서 올라가는 사람을 치한, 변태, 성범죄자 취급한다'는 사회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남녀 중 치마를 주로 입는 여성들에게 씌워지는 잣대 때문이다. "아니 저 사람은 치마를 입고도 가리질 않네. 경박해라"와 "아니 왜 내가 뒤에서 가는데 치마를 가려? 나를 치한으로 보는거야 뭐야?"와 같은 시선이 동시에 여성을 옭아맨다. 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뒷모습을 가리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가리지 않는것도 마찬가지다.

가려도, 가리지 않아도. 뭐 어쩌라고?


이 '떡밥'은 인터넷 세상에서도 고전이다. "나를 치한이나 변태, 범죄자로 보는 기분"이라며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앞서가며 뒷사람을 치한 취급을 하는 말을 한다면 기분 나쁜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항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치마를 가리는 것이 뒷사람을 모욕하는 일일까? 대화도 아닌 단지 행위만으로 '일면식 없는 사람들을 무안주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의문이다.

나 역시 이 도식을 보고 치마를 가려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치마를 가려야 하며, 더 나아가 ‘치마를 가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둘 모두 개인의 선택이며, 모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다. 애초에 ‘어그로'가 되지 말아야 할 얘깃거리가 바로 ‘치마 가리기’인 것이다.

여성이 경험하는 이런 동시성은 에스컬레이터 벽에 붙은 문구와 다르지 않다. '치마 속을 촬영하는 것은 범죄지만, 일단 치마를 입은사람이 나서서 가려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치마를 가리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범죄는 스스로 예방해야 하지만 내 기분 나쁘지 않게 치마는 적당히 가려달라'는 어투의 연장선이다. 치마를 가리는 일도 어렵지만, 이 모순된 시각 속에서 행동을 결정해야 하는 과정은 더욱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