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김형경의 뜨거운 의자]박탈과 결핍의 문화를 넘어서

여자는 결핍을 널리 공표함으로써 사랑받으려 하고, 심지어 그 결핍을 소중히 간직한다고 일찍이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결핍감 근원에 페니스 엔비(남근 선망)가 있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핸드백이나 구두를 목숨처럼 아끼는 것은 그것이 결핍된 것을 대체해주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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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자체로 아무 잘못이 없다. 심지어 그녀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 검은 구멍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모르는 채로 그것을 타인에게 떠넘긴다. 남자친구에게서 게임기를 선물받고 떠난 여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박탈감을 넘겨준다. 남자는 이제 결핍 상태를 인식하게 되며, 상실된 것을 보상받기 위해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게 된다. 다른 여자거나 중독 물질 같은 것을. 그러면서 가끔 중얼거릴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우리는 수직으로 수평으로 널리 박탈감, 결핍감을 퍼뜨리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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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면 우리의 성취감, 승리감, 강인함 등이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정신에 자연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복원력이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상실이 우리를 더욱 강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탈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의 승리가 가해자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의 죄는 영원히 그들 몫이라는 자명한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지난 24일, 소설가 김형경 씨의 ‘박탈과 결핍의 문화를 넘어서’ 칼럼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다. 김 씨는 여성을 필연적으로 결핍을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값비싼 선물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은 결핍에 대한 보상을 받고, 남성에게는 박탈감을 넘겨준다. 그리고 이를 모든 여성에게 해당한다고 보편화한다. 

김 씨의 전제부터 짚어보고자 한다. 여성은 탄생의 순간부터 결핍을 수반하는 존재인가? 프로이트는 여성이 남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기에 결핍감을 느끼고 남근을 선망한다고 했다. 프로이트라는 유명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에 기대지 말고, 직접 여성들에게 물어보자. 여성은 남근을 가진 남성을 부러워하는가? ‘네’라는 대답이 안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 이상 여성 대 남성이라는 대결구도 안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결핍감을 설명할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여성의 권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되었던 시대에서는 ‘여성은 결핍을 안고 태어난 존재다’라는 남성(남근)중심적 고정관념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우리가 고찰할 부분은 여성이 아닌 ‘인간은 결핍을 수반하는 존재’인가이며, 그렇다면 그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어봐야 한다. 김 씨는 이 부분에서 인간을 여성으로 치환하면서 여성을 ‘남성에 비해’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도 느끼는 결핍감에 대한 논의를 차단했다.

여성의 결핍이 아닌 인간의 결핍을 논의할 때이다.


김 씨는 전제에서부터 오류를 범하면서 여성의 결핍으로 인해 남성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잘못된 논리를 펼친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결핍감을 무기로 남성에게 값비싼 물건을 갈구하지 않을뿐더러, 남성에게 박탈감을 넘겨주지도 않는다. 어떤 문제든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논리로 설명한다면 문제에 대한 건설적인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하지만 김 씨가 언급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보편화’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페미니즘을 통해 이뤄져온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이해는 무너져 내리고 또 다시 성대결 논쟁을 불러  일으키거나 여성이라는 성(性)이 제2의 성으로 격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형경은 역사적, 사회적 결핍과 여성의 결핍을 연결지으려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칼럼에서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만이 두드러질 뿐이다. 김 씨는 여성은 결핍감, 남성은 여성으로 인한 박탈감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며, 그로 인해 승리의 역사를 써나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승리가 가해자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의 죄는 영원히 그들 몫이라는 자명한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끝을 맺는다.

도대체 그가 말한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박탈감을 극복한 남성의 승리가 ‘타인에게 (결핍감을) 떠넘기고’, ‘남자에게 박탈감을 넘겨’주는 여성의 잘못을 없애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는 ‘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자체로 아무 잘못이 없다’며 여성을 위로하는 척 하면서 여성을 가해자로 매도하고 있다.

김형경의 칼럼은 여성에 대한 시대착오적 오판으로 시작해 끝을 맺는다. 이런 칼럼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논의조차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남성은 결국 여성이라는 존재에 의해서만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여성의존적 존재인가. 남성이라는 인간이 느끼는 박탈감은 우리 사회에서 계속 논의되어져야할 쟁점임에도 김 씨는 보편화를 통해 단순결론을 내려버린다.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든 발언의 자유를 가진다. 김 씨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진보 언론이라고 하는 경향신문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칼럼을 게재했다는 것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다. 진보적인 태도는 여성과 소수자 등 상대적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스스로 진보적인 태도를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