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의 변화와 새로움의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고함20에서는 4월을 맞아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변화와 새로움을 느꼈을 ‘시골 출신 새내기’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이 기사는 서울역 한복판을 헤매고, 지하철 거꾸로 타기를 밥 먹듯 했으며, 탁한 공기에 기침을 해댔던 20살의 당신들에게 바치는 기사다. 이제는 조금 서울사람 같은 시골 출신 헌내기 5명과 여전히 부딪히고 깨지는 시골 출신 새내기 3명의 이야기를 모아 1인칭으로 재구성했다.


서울에선 서울말만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3시간의 기차 여행 후 도착한 서울역에선 서울말과 사투리가 제멋대로 섞인 채 고막을 때렸다. 흡사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삼천포’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고 느리기 짝이 없는 내 고갯짓과 달리 사람들의 걸음은 빨랐다. 촌티를 숨겨보려 부지런히 걸었지만, 애초부터 걷는 방법이 다른 인간인 마냥 내 발걸음은 좀처럼 서울 땅에 동화되지 못했다. 어색한 몸짓으로 두리번거리기를 10분, 서울역을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맡았다. 순간 숨이 막혔던 것은 단순히 서울 하늘의 미세먼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개강 1주차, 향수병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20살짜리 대학생이 엄청난 외로움을 느낄 거라 으레 짐작한다. 그들의 짐작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실이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지만 엄청나거나 못 견딜 정도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이불 속에서 훌쩍이거나 매일같이 집으로 전화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와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주는 설렘은 향수병을 떨쳐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3월 초 나의 향수병을 떨쳐낸 주범(?)은 바로 ‘신입생환영회’라는 이름의 술자리였다. 그 이름은 때로는 ‘개강총회’이기도, 그저 ‘뒤풀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자리에는 술게임이 빠지지 않았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다양한 술게임 가운데서 나를 가장 당황시켰던 것은 단연 ‘지하철’이었다.

“지하철~ 지하철~” “몇 호선~ 몇 호선~” “2호선!”
“어, 나는 서울 지하철 잘 모르는데…”

지하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20년을 살아온 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술을 마셔야 했다.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 지하철 1호선을 외쳤다는 이유로 술을 마셨다. ‘서울 지하철 노선 외우기’라는 귀찮은 과제는 3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내겐 너무 어려운 대중교통

지하철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술게임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하철과 버스로 대표되는 대중교통은 갓 상경한 나에겐 신세계와 다름없었다. 거미줄 같은 지하철노선도와 10분을 넘지 않는 버스 배차간격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갓 상경해 서울역을 빠져나온 뒤 마주친 ‘버스환승센터’는 놀라움의 극치였다. 수십 대의 버스 가운데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이 타야 할 버스를 챙기는 서울사람들의 모습에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때문에 나를 포함한 시골 출신 친구들은 대부분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선호했다. 방향을 바꿔 타기가 쉬운 버스에 비해 지하철은 안내가 비교적 명확했다. 졸지만 않는다면 지하철에서 목적지를 지나칠 염려는 없었다. 버스정류장보다는 지하철역을 찾기가 더 쉬운 것도 지하철을 선호하는 이유의 하나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버스로는 20분이면 갈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30분 동안 빙 돌아가기도 했다.

물론 지하철도 가끔씩 혼란을 안겨다 주었다. 2~3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이상한 곳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050원짜리 기본권만 있으면 다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역무원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어”라는 같은 처지의 친구의 말이 마냥 웃기지만도 않았다.




사투리가 대체 왜 귀여운데?

“사투리 귀엽다! ‘오빠야~’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사투리 억양을 고치지 못한 내게 사람들은 ‘귀여운’ 사투리를 써줄 것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오빠야’로 대표되는 경상도 사투리였지만 다른 지역의 사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청도 지역의 경우 사투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충청도 출신 친구에게 ‘했어유’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주도 출신 친구는 매일같이 ‘제주도 말 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표준어가 그저 서울 사람들의 억양이 배인 한국말이듯 사투리도 그저 지역 사람들의 억양이 배인 똑같은 한국말이라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은 너무도 간단히 무시했다. 미디어를 통해 정형화된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그들은 일말의 고민 없이 내게 투영했다. 일부 서울 사람의 막무가내 요구를 피하는 방법이 단지 ‘표준어를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도 가끔은 화가 났다.


출발선은 공평하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출발선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다를 바 없는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 친구들이 나보다 몇 걸음 앞에 서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레 다가오곤 했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된 대화는 종종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요?” “OO외고요!” “진짜? 나도 거기 나왔는데! 언제 졸업했어요?”로 전개됐다.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교복을 입은 동기들 중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가 더러 보였다. 출신 고등학교에 기인한 노골적인 차별은 당연히 없었지만 문득 심리적 소외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질적인 차이도 느껴졌다. 가장 큰 부분은 ‘영어’. 듣기와 읽기에 한정된 수능 공부만을 하던 나에게 말하기와 쓰기가 중요한 대학의 영어는 낯설었다. 더 큰 문제는 전국 각지의 외고와 국제고 출신이 즐비한 강의실 내에선 그 낯설음을 표현하는 것마저 부끄러웠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외국어 영역만큼은 걱정이 없던 한 친구도 “외고 애들 때문에 영어강의는 도저히 못 듣겠더라”고 푸념했다.


‘서울살이’의 즐거움을 깨닫는 날

2014년 3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쏜살같은 시간이었다. 그 빠른 시간 안에서 나는 변화를 거듭했다. 한 달 전에 비해 나는 조금 더 표준어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덜 길을 헤매게 되었다. 출신지가 마음에 주는 부담감도 많이 가벼워졌다. 긴 통학 시간에 힘들어하는 동기를 보면 집이 멀어 기숙사에 살 수 있는 내 처지가 훨씬 나은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하지만 노래 ‘서울 이곳은’의 가사처럼 화려할 줄만 알았던 서울 생활의 이면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변화는 빨랐고 서울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교통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하고 사람들은 내게 사투리를 써줄 것을 요구한다. ‘서울살이’의 진정한 즐거움을 깨닫는 날은 언제일까. 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탁하고 까만 하늘이 여전히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