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은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이 많았던 한해였다. 국회의원과 정치인, 교수 등의 못된 손과 말은 국민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화제가 된 높으신 분들뿐 아니라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추행 사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여직원 성추행 사건이 있었고 중소기업중앙회에서는 20대 계약직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으로 인해 자살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시향의 박현정 대표의 성희롱 및 폭언 사실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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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추행에 대한 보도가 많은 이들의 경각심을 깨운 것은 사실이다. 정부 기관과 기업들은 예방교육과 신고센터를 내세우며 성희롱, 성추행 근절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추행도, 이에 내포하는 권력관계 때문에 정당한 신고는 꿈도 못 꾸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추행은 내재된 권력 관계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성범죄 유형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가해자는 ‘상사’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가해자가 상사나 고용주인 경우 피해자는 거부 의사나 신고를 망설이게 된다. 그들은 인사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 결정권은 곧 생계와 연결된다. 


성희롱과 성추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회사에 말을 한다하더라도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2014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조차 성희롱 사실을 쉬쉬한 사실이 밝혀졌다. 르노삼성자동차 연구소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가해자가 고소당하자 사측은 피해 직원과 그를 도운 동료 직원에게 불이익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오히려 침묵하고 도망가야 하는 피해자들


피해자의 선택지는 두 개다. 그만두거나 참고 버티거나. 가해자와의 권력관계는 피해자에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분위기는 피해자의 입을 다물게 한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던 ㄱ 씨(24)는 "상사의 성희롱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고 그만두었다"고 했다. 상사는 바지 정장을 입는 ㄱ 씨에게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단정하다"며 치마 정장을 입을 것을 종용했고 "하체가 좋다"며 외모에 대한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말로 시작된 성희롱은 신체 접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볼을 꼬집고 어깨, 팔을 치거나 만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친근감의 표시일 수 있지만 피해자인 ㄱ 씨는 불쾌감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불쾌감을 표현하려 했지만 매번 ㄱ 씨의 입을 막은 것은 신입이라는 위치와 회사 분위기였다. 명백히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발언과 불편한 신체 접촉이었으나 지켜보는 그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같은 성적 발언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여자 선배들을 보며 회사 내 분위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ㄱ 씨는 "불쾌하다고 표현하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굴욕적이고 허망한 기분이었다. ㄱ 씨는 “회사에 다니기 전에는 부당함에 대해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성희롱을 당하고 난 후의 수치심과 회사의 쉬쉬하는 분위기, 그분이 상사라는 압박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ㄱ 씨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무력감으로 사직했고 지금은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는 중이다. 하지만 새로운 직장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까봐 불안하다고 했다. 


개인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는 ㅈ 씨(24)는 참고 버티는 중이라고 말했다. ㅈ 씨의 경우 면접 때 "쌍꺼풀 수술 왜 안 하나"라는 말을 들었다. ㅈ 씨는 외모 지적뿐 아니라 "남자친구랑 여행 가면 자고 오겠네" 등 성관계를 암시하는 발언을 수없이 들었다. 동의하지 않은 채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그 무엇보다 수치스러웠다. ㅈ 씨는 자신 외에도 피해자가 많으며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다. 정규직, 불이익을 빌미로 한 회유나 협박도 목격한 일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기분이지만 신고나 사직을 하기까지는 큰 결심이 필요하다. 당장의 생계와 앞으로의 직장 생활에도 상당한 타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ㅈ 씨의 경우도 같았다. “처음 외모지적이나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발언을 들었을 때 집에 가서 울었다. 소규모의 병원이라 직장 내에 신고할 곳도 없어서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 그만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외부에 신고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직장 생활에 미칠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를 포기했다.


피해자 불이익 조치를 막을 수 있어야


서울시는 '비정규직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책'을 수립하고 내부 신고 핫라인을 구축, 예방 테스크포스 구성 등 직장 내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 기관이나 기업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과 인식 개선 및 신고센터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나아지기는커녕 피해자들은 오히려 불이익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에 따르면,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가 되려 불이익을 받은 피해 사례 상담은 성희롱 상담사례 중 약 36%에 달한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성희롱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조직 문화와 관습에 균열을 내는 행위로 기업의 통제 권한과 지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진다. (중략) 성희롱 문제 제기 후 사측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는 피해자를 지켜보며 두려워하고 침묵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18일 재판부는 피해자의 사직을 종용하고 사건에 대해 미온한 대처를 한 르노삼성자동차는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다시 한 번 직장 내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을 막은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직을 결심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로 견뎌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