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점심 시간

점심시간 직장인들로 붐비는 서교동 식당 골목. 12시를 조금이라도 넘기면 기다리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인기 있는 식당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세월이다. 주변 직장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을 소화하기에는 식당의 숫자도 종류도 부족하다. 허름한 식당에서 동료들과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직장인 황정연씨(27세)는 5분을 늦은 탓에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5분이라도 늦어서 제 때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그야말로 밥만 우겨넣고 점심시간은 끝나는 겁니다. 처리해야 될 업무라도 있는 날이면 초조한 마음에 아예 사무실에서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기도 해요.” 황정연씨는 결국 느지막히 나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어렵게 찾곤 하는 직장가 앞 식당들은 맛없고 비싸며 불친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식당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특별한 아이템 없이도 꾸준히 장사가 잘 되는 것은 환영할만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비스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교동 식당가 생선 구이집 안주인도 그와 같은 고민이다.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 한 분 한 분 친절히 응대해드릴 수가 없어요. 알아서 제 때 반찬을 더 가져다 드린다든가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미리미리 정리해둔다건가 하는 것은 애당초 꿈도 못 꾸고 제때 음식을 내는 것도 버거워요. 점원을 더 쓴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이러한 물리적인 한계 앞에 직장가 앞 식당들의 불친절한 서비스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출처 : 헤럴드코리아>


양복 입은 신데렐라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손님이 몰리는 것일까? 대부분의 기업이 점심 시간을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로 책정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회사들의 점심시간이 12시에서 오후 1시까지로 일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무 시간과의 연관성이 크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표면상으로는- 일정상, 점심시간은 12시부터 한 시간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가정의 점심시간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회사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있다.

어느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70%가량이 식사 이외에 휴식 시간으로 20분을 채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줄을 서서 음식이 나오는데까지 기다리고 담배 한 대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시간을 빼고 나면 남은 시간마저도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쭈뼛대는데 써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업무 효율 저하로 이어지므로 회사 측에도 좋지 못하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아직 업무 능률이 떨어지는 신입 사원일수록 더하다. 한 홍보대행사에서 근무 중인 신입 사원 김정호(26세)씨는 손에 익지 않은 업무 때문에 언제나 바쁘다. “일이 끊이지를 않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산 더미 같은데 더 맡겨진 일도 끝이 안 보입니다. 여유 있게 밥 먹고 커피 한 대 마시고 소화시킬 시간이 없어요. 점심을 아예 건너뛰는 것도 다반사라서... 어쩌다가 여유 있는 날도 12시가 넘었는데 상사가 아직 자리에 앉아 있으면 먼저 나갈 엄두가 안 나요. 정작 밥은 굶으면서 야근만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지 서베이의 다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의 48.5%가 점심 식사를 하는데 평균 15~30분을 할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빨리 먹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면서도 실제 쉬는 시간은 20분 남짓하다는 것에서, 12시만 되면 빌딩가의 양복 입은 신델렐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30분, 왕자의 여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측이 직원들의 요구를 파악해서 반영할 의지만 있다면 30분만 늦추거나 앞당겨도 비효율적인 점심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점심시간을 주변의 다른 회사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 시간을 조정하는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규모가 큰 회사의 경우에는 부서별로 점심시간을 순차 적용하기도 한다.

‘아침은 황제처럼, 점심은 왕자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이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그 동안 황제도 왕자도 되지 못한 주린 배를 저녁에 거지 된 심정으로 술로 달래곤 했다. 탄력적인 시간 적용이 확대되어 최소한 왕자처럼 점심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