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화라고 하면 우리는 ‘오타쿠’라는 단어를 손쉽게 머리에 떠올린다. 그만큼 일본문화의 특이성이 함축되어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오타쿠 문화’를 설명하려 하면 집착, 변태 같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오타쿠 문화가 국내에 암암리에 퍼지면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단지 오타쿠 문화에 대해 혐오감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오타쿠 문화, 특히 그 중에서도 ‘미연시’라는 생소한 주제로 글을 전개하려 한다. ‘미연시’라는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미연시의 그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미연시, 그 생소한 이름

미연시 자체가 사람들이 꺼려하는 오타쿠 문화 중 일부분인지라 꽤나 생소한 용어로 들릴 것이다. 미연시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약자로 본래는 연애만을 다루면서 각 분기별로 선택지를 고르고 그에 따라 나누어지는 여러 스토리를 즐기는 게임이란 뜻이다. 그리고 일러스트와 텍스트의 조합으로 스토리는 진행된다. 소설을 컴퓨터 화면으로 옮기고 동일한 세계관과 비슷한 캐릭터들로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비교적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모두가 알만한 해리포터라는 소설을 미연시로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이 때, 주인공 해리는 초챙이라는 동급생과 순정만화처럼 사랑이야기를 풀어가며 커플이 되는 좋은 결말(good ending)을 맞을 수도 있고 또는 론같은 절친한 친구를 숙적 볼드모트에게 잃은 뒤 복수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혹은 연애의 대상이 헤르미온느로 바뀔 수도 있고 주인공인 해리가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는 안좋은 결말(bad ending)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아메리카노와 카라멜 마끼아또를 동시에 주문한 것처럼,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복수의 스토리가 미연시에는 존재한다.

이렇게 하나의 게임에 내장된 복수의 스토리는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선택지가 무엇이냐에 따라 특정 스토리로 결정되고 정해진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플레이어가 ‘초챙에게 같이 춤추자고 한다.’,‘헤르미온느에게 같이 춤추자고 한다.’라는 2개의 선택지에서 ‘헤르미온느에게 같이 춤추자고 한다.’를 선택하면 헤르미온느와 커플이 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보통은 간단히 한두가지 선택지만으로 결말이 달라지진 않고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조합되어 마지막 결말이 결정된다.

현재, 미연시는 연애만을 다룬다는 본래의 단어 뜻에서 벗어나 판타지나 호러같은 주제를 다룬 게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본래, 이러한 개념을 지칭하는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가 있었으나 보통 미연시와 정확히 구분되어 사용되지는 않고 혼용되는 편이다.


미연시에 나오는 여자는 다 똑같다?!

자료 출처 - http://image.search.daum.net/dsa/search?w=imgviewer&q=%C5%F5%C7%CF%C6%AE2&SortType=tab&lpp=27&page_offset=13&page=9&olpp=&opage=&od=RvsLK000


미연시를 플레이하다보면 분명히 서로 다른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여성캐릭터의 성격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는 미연시 내의 여성캐릭터들의 성격이 일정한 틀에 따라 유형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이런식으로 유형화된 성격을 부르는 오타쿠들만의 은어도 존재한다. ‘츤데레’라는 용어가 대표적인데, 츤데레는 속으로는 주인공을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부러 틱틱대면서 본심을 감추는 성격을 지칭하는 은어다. 츤데레는 현재 각종 미연시에서 여성캐릭터의 성격으로 빈번하게 차용되고 있다. 여성캐릭터의 성격뿐만 아니라 신체적 특징, 옷이나 악세서리를 유형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향을 통틀어서 ‘모에’라고 부르는데, 수영복 입은 여성을 좋아하면 ‘수영복 모에’, 안경 낀 여성을 좋아하면 ‘안경 모에’ 등으로 부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미연시 하나를 만들 때에도 미연시의 주된 수요자가 되는 오타쿠들의 성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당돌하고 틱틱대는 여자 하나, 안경 낀 차분한 여자 하나, 어리고 귀여운 여자 하나를 만들고 그 이후에 스토리를 생각하는 식이다. 그래야지 오타쿠들에게 충분히 어필하면서 게임자체와 더불어 게임에서 파생된 상품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미연시 제작 회사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놀랍게도 이런 식의 상업성은 한국 아이돌 시장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섹시함 또는 귀여움이라는 컨셉은 모에와 비슷하고 뛰어난 외모를 노래실력보다 더 우선시하는 건 스토리보다 캐릭터성을 더 고려하는 면과 닮았다. 음지의 세계라는 미연시 분야와 사회 전반적으로 일반화된 아이돌 문화가 비슷한 일면이 있다는 건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너를 살 수 있다면 돈은 아깝지 않아

 
앞서 언급했던 미연시에서 파생된 상품 이야기를 해보자. 미연시에서 파생된 상품은 주로 캐릭터상품인데, 여성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라던가 여성캐릭터와 닮은 피규어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아키하바라는 이런 식의 캐릭터상품의 판매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인데, 미연시 이외에도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등 오타쿠 문화에 포함되는 분야의 상품 및 그에 파생된 상품들이 잘 진열되어 있다. 

자료출처 - http://blogx58.tistory.com/107?srchid=BR1http%3A%2F%2Fblogx58.tistory.com%2F107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이러한 파생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오죽하면 오타쿠들이 일본 경제를 이끌어간다고 할 정도일까. 2005년 노무라 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연시를 포함한 오타쿠 시장 규모가 4조원 정도라고 했으니 앞선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한 예가 될지 몰라도 한 때 이슈가 되었던 화성인 바이러스의 십덕후편을 떠올려본다면 오타쿠들이 얼마나 캐릭터를 사랑하고 그와 관련된 상품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타쿠 문화는 일본문화 중에서도 멸시받는 음지의 문화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가볍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단지 변태들의 문화라고 가볍게 치부된 미연시의, 시스템을 일부 차용한 게임이 국내에서 개발되고 오타쿠들만의 용어라고 생각했던 츤데레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차츰 퍼져가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렇게 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됐든 미연시도 오타쿠 문화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