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언제나 불만이 많다. 누가 봐도 최선인 선택을 해야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고 유권자에게 지지를 받기에도 유리할 텐데, 차선을 선택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럴 때 외친다. “내가 해도 너보단 잘하겠다!”

정치인들이 이런 국민들의 생각을 언제나 읽지 못해 이런 착오를 낳는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일반 국민일 때와는 다르게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 개인의 이익과 유권자의 요구의 조화
기업과 정당의 유사성 

기업의 실패를 분석하다 보면 보통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기업의 현재 생산 능력, 잉여 인적 자원 등의 내부적 상황만을 고려하여 제품을 내어놓게 되면,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여 시장에서 퇴출되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의 옴니아폰은 하드웨어보다 인터페이스 등의 소프트웨어의 퀄리티에 중점적인 가치를 두는 소비자들을 무시하고 삼성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점인 하드웨어에 집중을 하는 방식을 고집하여 처참한 실패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 기업만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정치도 유권자라는 소비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가치보다도 다른 것들을 중시하고는 한다. 정당도 기업처럼 하나의 조직이기에, 조직의 목적만 다를 뿐 조직 내부의 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7.28 재보궐 선거에서 정세균이 장상을 선택한 이유


7.28 재보궐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구였던 ‘은평(을)’에 민주당이 이재오의 대항마가 되기 어려운 장상 최고의원을 공천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듀나게시판에서 정치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시는 마르세리안님의 분석이 적절한 것 같아 요약하여 소개한다. 

민주당이 가진 선택 중에 ‘은평 을’에 가장 적절했던 것은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서울시장을 두 번이나 양보했고 야권연대에도 유리한 좌쪽으로 살짝 치우친 중도이다. 이번 6.2 지방 선거에서도 경선도 치러보지 못한 채 한명숙 전 총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내어 주는 등 당을 위한 희생도 여러 번 했다. 문제는 한명숙 전 총리가 떨어졌다는 데 있다. 민주당이 서울에서도 시의회와 구청장을 휩쓸었는데 서울 시장을 적은 표차로 놓친 것은 분명 당의 문제가 아니라 한명숙 전 총리의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 시장 선거의 패배 책임은 한명숙 전 총리를 공천한 정세균 대표에게 있는 것이다.

정세균 대표가 이계안 전 의원을 공천해서 이재오를 꺾고 당선 되면 ‘정 대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라는 반응 보다는 ‘아니, 이재오를 이길 정도라면 서울 시장도 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계안 전 의원 공천은 당의 이익은 대변 할 수 있지만 정세균 대표에게는 이겨도 본전 지면 후폭풍인 선택지이다. 이겨도 한명숙 공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세균 대표가 생각한 거물급 공천이 신경민 전 앵커였다. 하지만 신경민 앵커는 민주당에 기여한 바가 없는 낙하산이다. 내부 반발은 당연히 심해질 수 밖에 없었고 당 내 입지가 부족한 정세균 대표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변수가 생긴다. 손학규 전 대표의 8월 전당대회 출마가 가시화된 것이다. 정세균과 손학규는 지지층이 겹친다. 게다가 손학규는 정세균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세균이 내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신경민 전 앵커를 공천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민주당에서 세를 가지고 있는 장상 최고위원을 공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르세리안님 분석 원문 : http://djuna.cine21.com/xe/?mid=board&search_keyword=%EB%A7%88%EB%A5%B4%EC%84%B8%EB%A6%AC%EC%95%88&search_target=nick_name&document_srl=319216)

이러한  마르세리안님의 분석은 추측이 대부분이지만 설득력 있다. 정치인은 정당의 이익이나 유권자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개인의 위치와 이득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정세균 대표는 이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변수와 상황에 따른 정세균 개인의 선택은 야권연대 지지자들에게 이재오의 부활을 지켜보게 했다. 그리고 정세균에게는? 우리 모두 결과를 알고 있다시피 재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전당대회에서도 정동영, 손학규, 정세균의 3강 중 가장 적은 득표를 하여 당내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처음부터 이계안 전 의원을 공천 했다면 이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라는 것이 여러 변수, 당의 이득, 개인의 이득을 한 번에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의를 반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두 번째, 다수의 이득과 소수의 희생의 조화 
위정자의 시각과 민중의 시각



드라마 <최강칠우>에서 나장인 칠우(문정혁 분)와 민사관(전노민 분)은 자주 갈등을 빚는다. 신분 때문에 사고관에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는 전체적으로 평민인 칠우가 양반인 민사관의 사고가 잘못 되었음을 가르치는 구도를 가지고 있어 인상 깊었다. 사대부의 사고에 갇혀 있던 민사관이 한낱 나장에 붙과한 칠우에게 깨우침을 받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적인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청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여 하나 뿐인 동생을 공녀로 바치게 된 민사관은 분하고 슬프지만 밤의 자객으로서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로 한다. 구해낸 다고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 사관은 “더 많은 공녀를 요구하고, 또 더 많은 공녀를 요구할 텐데. 몇 명을 구하느라 병자년처럼 수만 명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요.”라고 위정자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자 칠우는 눈이 뻘겋게 변해 울분을 토해낸다. “난 그게 맘에 안 들어. 사대부들, 높으신 양반들은 사람 목숨 가지고 숫자 놀음을 한단 말이지. 만 명을 위해서 너의 백 명은 그냥 죽어라. 누구나 목숨은 하난데 그런 강요를 하는 거지. 지들이 죽을 것도 아니면서.”

희생하는 소수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의 선택 

민사관은 현실세계의 정치인으로써 사태를 바라보고 칠우는 개개인의 삶에 감정이입한다. 개개인이 모두 정치적 선택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아마도 이상세계밖에는 없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써 하는 선택들은 일반인이 내리는 결정과는 달리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를 고려해야한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의 불행을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다수의 이익을 보장한다면 소수의 불행을 무시하는 선택을 피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실 세계의 정치인이 처한 딜레마이다.
 


‘고함 20’에서도 최근 언급한 부실대학 퇴출 문제도 그러하다.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에게는 모교가 사라지는 것이 눈앞이 캄캄한 일이겠지만, 앞으로 대학교에 입학할 학생들과 대학이 가는 것이 필수가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 뿐만 아니라 FTA 비준 역시 다수에게 더 싼 가격의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여 국민들의 실질적 부를 증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기반으로 추진하지만, 농민들의 아픔은 다수를 위해 소수가 짊어져야 할 짐일 뿐이라 치부한다. 도로확장, 재개발, 세제 정책 등등 어떤 하나의 정책을 추친 할 때 마다 어떤 누군가는 눈물을 짓게 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이들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정책을 추진할 때에는 희생하는 소수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배려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찰을 어떻게 해결하는 지에 그 정치인의 인품과 능력이 배어나곤 한다. 어떠한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가릴 때에도 수치로 환산한 경제적 부분 뿐 아니라 이러한 부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치인을 이해하는 방법

나 역시 매번 정치인을 비난한다. 그 사람의 지지자이건 아니건 간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과 정책을 강행 할 때 마다, “내가 해도 너보단 잘하겠다.”라고 시원하게 외친다. 하지만 과연 내가 진짜로 정치인이 된다면 잘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하니 정치가 단편적으로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 어느 시대고 완벽한 정치인은 없는가.” 하는 탄식같은 의문이 풀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앞으로도 정치인들에게 완화된 잣대를 대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인의 고뇌를 일부 이해한다 해도 그들은 국민들에게 선택된 책임이 부여된 사람들이고 나는 일반 국민으로써 정치인들에게 “내가 해도 더 잘하겠다!”라고 시원하게 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