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인권을 아우르는 국내 유일의 영화제 ‘피움’이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4일간 열렸다. 둘 다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고, 정통해지고 싶은 분야여서 아마 한번쯤 기웃거리기라도 했을 여성인권영화제. 지난 9월 인터뷰했던 피움 스탭 란희님의 권유로 망설임 없이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는, 모두가 만들어 가는 영화제라는 말에 혹했던 까닭이다. 수업이 없던 8일, 정독 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한 씨네코드 선재로 향했다. 어쩐지 대중적이지 못한 것 같은 두 가지 소재를 엮은 피움에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왔을까, 하는 작은 호기심은 금세 해결되었다. 입구부터 북적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홈페이지, 블로그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표면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 피움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 자체적으로 피움이 빛났던 순간 Best 3를 꼽아 보았다. 이미 영화제를 다녀온 당신이라면 필자와 어떤 교집합을 만들고 있는지 맞춰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피움과 아무런 인연을 만들지 못한 당신이라면, 글 안에서 내년 피움에 자진해 가게 될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다.


빛났던 순간 1, 지나칠 수 없는 행사 꾸러미들

씨네코드 선재에 들어서는 길목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관객들을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까지 아내폭력(아내를 향한 남편의 일방적인 폭력이니 부부싸움으로 오래하지 않길 바란다)으로 희생된 피해자 53명을 기리기 위해 놓아 둔 신발들이었다. 머릿속에서 직, 간접적으로 겪었던 폭력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한 짝 밖에 없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신발들의 향연을 보며 소름이 끼쳤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신발들을 도대체 어떻게 현장에서 가져왔는지 궁금해 했는데, 연출된 것이라는 스탭의 도움말을 듣고 나서야 의문을 겨우 해소할 수 있었다. 

여성 포털사이트 ‘언니네’가 매년 선정하는 ‘꼬매고 싶은 입’을 알고 있는지. 여성 비하 발언을 한 이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상을 수여하는 것이다. 피움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준비했다. ‘그 입 다물라!’가 그것인데, 여전히 활개 치는 여성비하 발언을 모아 관객들에게 가장 다물게 하고 싶은 입이 무엇인지 스티커를 붙이는 코너였다. 말 한 마디에도 화제성을 담고 있는 유명인사들에게서 지저분한 말이 많이 나왔는데, 화면에 옮기기조차 꺼려지는 저질 발언이 대부분이었다. 치미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고심 끝에 스티커를 붙였다.  누가 더 정성스럽게 헛소리를 했는지를 따질 때 이렇게 고민해야 하다니 기가 찼다.

쉼터에 머무르는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직접 그린 미술치료 작품 전시, 안타깝게 스러진 여성폭력 피해자들을 기리는 추모연못 등 영화제 본 섹션의 부족한 2%를 여러 부대행사들이 채우고 있었다. 피움이 마음속에 새겨졌던 첫 번째 순간이었다.


빛났던 순간 2, 감독과의 대화가 주는 깨알 같은 재미

흥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부대행사도 좋지만, 영화제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상영되는 작품이 아닐까. 책자를 통해 본 영화들은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필자는 당시 매진 임박에 이르렀던 피움 줌 아웃 ‘연애의 이해와 실제’ 편을 보았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소책자에 적혀 있던 만큼 재미있지는 않아서였다. 재미 찾기는 둘째 치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무척 많았다. 전부 30분 이내의 짧은 작품이라서, 의아함에 벌리고 있던 입을 채 다물지도 않았을 때 영화가 끝난 적도 다반사였다. 분명 괜찮을 거라고 남자친구 손까지 이끌고 왔는데, 이런 황당한 일이!

다행스럽게도 피움은 영화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감독과의 대화’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쌍둥이들>의 문제용 감독, <죽기 직전 그들>의 김영관 감독이 관객들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친절히 답했다. 기억에 남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이 영화가 여성인권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도발적인 질문에 문제용 감독은 ‘남녀가 만드는 권력관계가 연애이기 때문에 이 섹션에 상영된 것 같다’고 했고, 김영관 감독은 ‘저렇게까지 나를 좋아해주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여성 관객분들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 튼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예민한 여심을 잘 파악하고 조명한 <쌍둥이들>의 문제용 감독에게는 여성 심리에 대한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 그는 여심 파악 비결로 ‘이루고 싶은 게 있는데 잘 안 될 때, 그때 욕망이 더 커진다‥ 기본적으로 인간 욕망에 관심이 있고, 그 중에서도 여자가 더 좋아서 그녀들을 관찰한다’고 말했다. 

대개의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관객들이 알아서 왠지 대단히 날카롭고 멋져 보이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지만, 피움은 보다 친근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기에 그런 부담이 훨씬 적었다. 관객들은 호기심에, 때로는 짓궂게 영화 내용에 대한 질문을 했고, 또 연애관 등 사적인 부분도 서슴없이 물었다. 영화 궁금증도 해소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공유하는 '감독과의 대화'는 양념 같은 재미를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빛났던 순간 3, 미주알고주알 나누는 이야기

그날 4시 30분 스페셜 섹션만 보기로 했던 필자와 필자의 남자친구는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 추천 받은 개막작 <침묵을 말하다>까지 보게 됐다.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죽여서 복역 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였다. ‘폭력에 맞서는 여성 재소자들’은 침묵을 깨고  감옥 밖으로까지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 ‘그렇게라도 폭력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급박한 상황’을 인정받아 형을 감면받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다는 것.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바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다. 살인이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지만, 심할 경우에는 무려 20년간이나 온몸으로 상처 입었던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물음에서부터- 가정폭력이 워낙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라 꽁꽁 감추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행이지만, 결국 미약하게나마 목소리를 내야만 실상의 심각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다큐에서처럼 눈에 보이는 큰 변화까지 일으킬 수 있는 것 같다는 주관적인 감상까지. 평소 보던 종류가 아니어서 생소한 감이 있었으나, 다큐가 전달하는 불편한 진실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남자친구의 말을 듣고- 여기 오길 잘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단순히 신기한 거 구경하고 온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가 던지는 생각거리들을 곱씹어 보게 되어서 뿌듯했다. 피움이 빛났던 마지막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