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대해서 얘기한다. 브라만의 자식으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그러나 더 큰 깨달음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사문이 되기도 하고, 이미 해탈한 석가모니를 만나기도 하며, 속세의 범부(凡夫)처럼 생활하기도 하고, 뱃사공이 되기도 한다. 그는 사문이었을 때에도, 범부였을 때에도, 뱃사공이었을 때에도 큰 깨달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과정은 단 하나의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 깨달음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다. 말 그대로 공부하는 곳이다. 학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의 공부는 어떠한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부는 하고 있는가. 물론 모든 공부를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서 이루라는 것은 아니다. 교재를 공부하기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해보기도 하고, 이미 논해진 쟁점들을 습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재의 문제점을 찾아보고, 스승의 가르침을 반박해보며, 이미 논해진 쟁점들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는가. 스스로의 사색이 깨달음을 얻는 것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충분조건이다.

   



3.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학생 스스로 때문에, 그리고 수업 그 자체 때문에 쉽지 않다. 우선 학생들은 혼자만의 사고를 통한, 비판적인 생각으로의 공부만을 하긴 어렵다고 한다. 학생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걱정은 역시나 취업이고, 그러다보니 학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학점 잘 얻을 수 있는 수업’ 위주의 수강신청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인 오준수(가명, 22, 정치외교학)씨는 “신입생 때 ‘대학에 들어왔으니 이런 것도 들어봐야지’라는 생각에 토론 위주에, 보고서가 많은, 그리고 시험은 서술형 위주인 수업을 들어보았는데 역시나 학점은 생각보다 안 나오더라고요. 물론 수업에 만족하긴 했는데, 학점이 중요한 상황에서 계속 이런 수업을 들어야 하나 회의감도 들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이 외에도 학생들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수업들보다는 일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수업의 수가 월등히 많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본인의 나태함 등을 이유로 들기도 했다.

 학교 시스템 상의 문제점 역시 존재한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수업을 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 대학정보공시에 따르면 전임교원 1인당 학생 수는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40명까지이다. 하지만 안식년을 가진 교수나 연구 위주의 업무를 보는 교원 등을 제외하면 이 수치는 더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즉 교원 1명이 담당해야 할 학생 수가 30명에서 50명은 된다는 것이다. 특목고에서조차 토론식 수업을 위해 15명 내외의 반을 따로 편성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수치는 토론 위주의 수업을 하기에 어려운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세은(가명, 21세, 독어독문학)씨는 “토론 위주의 수업이라고 들어보았는데, 40명 정도가 있었어요. 결국 조별로 나누어서 토론을 하긴 했는데, 집중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전임교원 1인당 학생 수는 35.0명이다. 홍익대학교 경영학과의 재학중인 이민상(가명, 21세)씨 역시 토론 수업에 학생 수가 많다보니 토론 역시 참여하는 사람만 하게 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피드백을 잘 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불만을 표했다.

   

학생의 입장에서나 학교의 입장에서나 풀기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공부에 있어서 자각(自覺)만큼 중요한 부분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