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안보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것은 ‘종북세력’에 대한 비판이다. 적절하다. 종북세력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물론 북한 역시 우리와 같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북한 정권은 어쨌든 우리의 주적이 아닌가. 그렇지만 항상 안타까운 것은 하나같은 그들의 좌파 매도이다.


종(從)은 종들이나 할 일

종북이든 종미든 종일이든 종중이든 친(親)을 넘어서는 종(從)을 하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한 국가 내에서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 어느 한 국가를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행위는 국가의 이익이나 정체성에 어떠한 득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좌파는 종북세력이 아니다

좌파는 절대로 종북세력이 될 수 없다. 좌파의 개념과 종북의 개념은 앞서 말했듯 완전히 다른 선상의 개념이다. 또한 대등한 지위를 가진 개념도 아니다. 이는 진보와 보수, 민주주의 또는 정의와 관련된 논쟁과 비슷한 맥락이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민주주의나 정의와 같은 것 보다 후차적인 문제다. 민주주의나 정의는 항상 선결되어야 할 필수적 과제이고, 진보와 보수는 그 이후에 따져야 할, ‘갈등이 발생되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진보든 보수든 민주주의나 정의는 항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하며, 진보세력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고 보수세력은 독재를 지향한다와 같은 명제는 얼토당토 않다.

좌파와 종북의 관계 역시 이런 것이다. 좌파이든 우파이든 종북은 ‘하지 않아야 하는’ 선결 과제이다. 이는 ‘우파는 종미세력이다’라는 또 다른 잘못된 명제에서도 나타난다. 좌파든 우파든, 종북 · 종미 · 종일 · 종중 등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한 국가를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에서도, 외교적인 개념에서도, 국익의 차원에서도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 한 것이다. 건전한 좌파나 건전한 우파는 종북이나 종미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북이나 종미 ‘따위’의 것을 좌파나 우파와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이념의 척도는 하나가 아니다

논의를 좌우구분까지 확대시켜보자. 우리나라는 어떤 한 사람을 좌파나 우파, 혹은 중도로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 한 가지 잣대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잣대는 주로 대북 관계에 대한 관점이나 경제적 관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단일 척도에 의한 구분은 개인이나 집단의 성격을 호도할 수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간단하게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도 보통은 두 가지의 척도를 사용한다. 정치와 경제의 척도인데, 국가의 규제 정도와 시장 경제의 지향성에 따라 구분한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강하면 정치적 우파, 무정부주의에 가까우면 정치적 좌파로 구분한다. 또한 자유방임 경제를 지향할수록 경제적 우파, 계획 경제를 지향할수록 경제적 좌파로 구분한다.

이 두 개의 척도를 사용하더라도 총 4가지 경우의 유형이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의 구분을 위해서는 특수한 척도가 몇 가지 더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대북 관계에 대한 입장이다. 북한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좌파로,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우파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안보 개념이라든지, 수세(收稅)에 대한 입장 등과 같은 척도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그 유형은 8가지로, 16가지로, 24가지로 증가한다.

단순히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비교해보자. 한나라당의 경우에는 정치적 척도나 안보 개념에 대해서는 모호하지만 경제적으로나 대북 관계, 수세(收稅) 문제에 있어서는 확실한 우파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의 경우에는 역시 정치적 척도나 안보 개념에 있어서 모호한 부분이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우파, 대북 관계와 수세(收稅) 문제에서는 좌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치적으로 두 정당이 모호하다고 한 이유는 국민에 대한 규제에 관하여 분석하려면 한두 가지의 척도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안보 문제에 대해 모호하다고 한 이유는 ‘미국과의 관계를 통한’ 안보와 ‘자주 국방’을 지향하는 태도 사이의 ‘가치’문제에 대한 논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확실한 경우만 다루었다.


한 가지 척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폭력

앞서도 다뤘듯이 좌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세 개도, 네 개도, 그 이상도 될 수 있다. 그에 따라 그 유형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기준으로만 대상을 파악하고, 그 것으로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흔히 ‘좌파 대통령’으로 불리는 김대중 ·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여러 가지 잣대를 들여다보면 딱히 좌파라고 불려야 하나 생각될 정도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공론장 형성과 억압적 제도들을 철폐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어느 정도 좌파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을 살펴본다면 그 어느 대통령보다도 강력한 신 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쳤으므로 우파라고 볼 수 있다. 대북 관계에서는 많은 지원을 행하였으므로 좌파라고 할 수 있으며, 안보적 입장을 볼 때도 논쟁거리가 있긴 하지만 ‘자주 국방’에 대한 추구 역시 최소한 좌파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좌파나 우파 인사들 대부분에게서 나타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이명박 대통령에게서도 공히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어느 하나의 잣대로 판단하여 다른 영역에까지 판단을 확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인물에 대한 정치적인 폭력인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매우 성급해졌다. 원래부터 급한 성격일 수도 있고, 사회를 지배하는 인터넷의 ‘인스턴트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성급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정치적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한미 FTA를 체결한 인물이 북한에 지원하고 세수를 증가했다는 이유로 좌파로 평가받고, 계획 경제를 실천한 인물이 카리스마적 통치와 강경한 대북관을 이유로 우파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치 서열이 다른 문제를 동등하게 여기고, 그것을 통해 인물을 호도하는 경우이다. 남한에 살며 ‘어버이 수령’을 찬양하고 ‘주체사상 만세’를 외치는 종북주의자들을 건전한 좌파들과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미국을 ‘건국의 아버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수호신’으로 여기는 종미주의자들을 건전한 우파들과 동일시 해서도 안 된다. 이는 정말로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나라의 계속된 발전을 위해 각각 좌파와 우파라는 도구를 선택한 건전한 사람들을 매도하는 일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바람직한 태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