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 한 강의실에서 10학번 학생들과 11학번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수업 시간 후 조별 모임을 갖게 된다. 후배가 선배에게 존칭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11학번 중에는 재수를 해서 10학번과 나이가 똑같은 그리고 삼수를 해서 10학번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 있다. 과연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0학번이 선배이니 무조건 존칭을 쓸 것인지, 11학번 중 나이가 많거나 같은 둘을 연장자, 동갑으로 보고 대화를 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생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일보
 

학번제와 나이제는 무엇인가요

현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 및 학과 별로 <학번제>와 <나이제>라는 규칙이 존재한다. 학번제는 말 그대로 대학에 입학한 순서인 학번으로 상급생과 하급생으로 구분하여 하급생이 상급생에게 말을 높이는 것이고, 나이제는 학번에 관계없이 연장자에게 존칭을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규칙은 뚜렷하고 일리있는 각각의 이유가 존재한다. 

먼저, 사회적 나이와 생물학적 나이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두는가에 대한 인식 차이이다. 학번제의 경우 대학교를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입학을 먼저 한 사람이 대학 사회의 선배이고 연장자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후배 중 나이가 본인과 같거나 많은 사람이 있어도 대학 사회는 입학을 먼저 한 사람이 더 많이 겪었기에 학번의 순서대로 대우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학번제는 사회적인 나이를 고려한 것이다. 반면에 나이제의 경우, 먼저 태어난 사람이 연장자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의 개념이 아닌 전반적인 상황에서 연장자를 결정한 규칙이다. 나보다 더 많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 전통의 미덕인 '장유유서'를 계승하여 나이순으로 대우를 한다. 나이제는 생물학적인 나이를 고려하여 정해진 규칙이다.

둘째, 재수를 개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으로 볼 것인지,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 볼 것인지의 견해 차이이다. 학번제를 선택하여 규칙으로 삼고 있는 대학, 학과의 경우에는 재수는 누가 강요해서 한 일이 아닌 입학생 본인의 사적인 문제 또는 더 좋은 학교에 가고 싶었던 열망 등의 이유로 재수를 선택한 것이므로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된다고 생각한다. 재수를 선택했을 때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모두 감수하겠단 전제 하에 재수를 하여 대학에 입학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나이제를 선택한 대학, 학과의 경우에는 재수가 본인의 1년을 희생하여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개인의 의사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불이익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규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타당한 이유가 있는 학번제와 나이제, 과연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학번제를 택하고 있는 A동아리에서는 '송신' 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고 한다. 09학번 후배가 07학번의 선배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08학번을 거쳐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으로 이는 구성원 간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고 동아리 내에서 비밀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한다. 마치 군대의 상향식 보고를 연상케 하는 이 규칙이 바람직한 것인가?

또, B학과에서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후배가 선배에게 '언니' 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언니’ 라니. '언니'라는 말이 여성 청자보다 어린 여성 화자가 여성 청자를 칭할 때 쓰는 표현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리에겐 생소하고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B학과에서는 '언니'가 생물학적 나이란 의미가 아닌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학번이 높은 선배를 연장자로 생각하고 이를 친근하게 칭하는 말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나이제를 규칙으로 삼은 C학과에서는 동일한 나이지만 선, 후배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지켜야 될 선이 애매모호해 분란이 잦다고 한다. 한 학번 차이가 나는 동갑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해서 놓았는데 둘 보다 학번이 높은 선배가 못 마땅해 하거나 나이가 같아서 말을 놓았는데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뒤에서는 나이가 같은 선배가 후배에게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당사자 간의 협의에 따라 결정하라는 보완책이 있지만 그 방법이 추상적이라 보는 이들의 시각이 다름에서 오는 문제가 여전히 분란이 생기는 이유라고 한다.




위의 사례들은 학번제와 나이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사회에 나가면 적게는 1~2살, 많게는 4~5살의 나이 차이가 나도 친구라 여긴다. 즉, 대학교에서는 선․후배 사이일지라도 나가면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후배가 입사 동기가, 또는 입사 선배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학번과 나이 모두 숫자에 불과하다. 그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규칙도 좋지만, 그 사회의 합일된 마음 또한 중요하다.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한 대학을 이루고 학과를 구성하는 학생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질서를 유지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