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20대, 당신의 삶에 찾아든 불청객

치열한 입시를 마치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당한 대학에 합격해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을 꿈꾸던 당신. 이십대의 특권을 누리고 싶던 당신에게 무언가가 날아든다. 신체검사통지서(소위 신검영장). 당신은 가까운 병무청을 찾아 당신의 몸에 급수를 매긴다. 그리고 잊는다. 당신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20대의 낭만을 누린다. 그리고 알게 된다. 그 낭만은 계속 될 수 없음을.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는 병역을 마친 자와 마칠 자로 양분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신이 이제 ‘마칠 자’에서 ‘마친 자’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어야 함을. 당신에게 입영통지서(소위 입대영장)가 날아든다. 머리를 깎는다. 섧게 우는 여자친구를 본다. 가기 싫다, 그러나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는 말이 들린다. 당신은 묻는다. 과연 영장으로 상징되는 군대는 20대의 불청객인가, 아니면 성장촉진제인가.

20대의 인생에 이 종이는 소리없이 찾아든다

영장, 가치관의 불청객
-이년 동안 내가 본 책은 팔할이 MAXIM 이다 -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일견 옳다. 낮에는 게임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던 철없던 아들이 군대를 다녀오더니 공부를 하는 모습은, 또 매일 방을 어질러놓기만 하던 아들이 군대를 다녀오더니 이불을 개는 모습은, 분명 ‘사람’ 된 모습이다. 그러나 과연 이 변화는 군대 때문일까. 우리가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는 말을 할 때 간과하는 것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은 결국 2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물론 군대에서의 경험이 성장을 촉진시켰을수도 있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보다 2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점이 성장에 더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역이라는 '사건'에 가려 시간이 지났다는 본질이 가려졌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 는 말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람이 된다.’ 는 말에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된다는 말 앞에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라는 말이 빠져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배치를 받는 순간, 조교는 말한다. “너희가 자대에 가서 할 수 있는 말은 딱 네 가지이다. 예!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그

당신도 모르게 당신은 마초가 된다.

렇게 획일화 된 2년을 지내며 군인은 바보가 된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현상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는 방법을 잊는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에는 군대를 다녀와야 기성세대에 편입할 수 있고, 상명하복의 권위주의가 팽배한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는 지극히 반 20대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입대로 인해 변하게 되는 가치관은 그 뿐만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필자가 복무하던 군대에서는 정훈자료가 배송될 때, 과월호 MAXIM 이 딸려 왔다. MAXIM 은 유명한 남성잡지로, 성을 상품화한다는 거센 비판을 받는다. 대부분의 군인은 2년 동안 MAXIM을 벗하며 살아간다. 필자의 부대처럼 정훈자료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후임병에게 사오게 하거나 때로는 정기구독까지 하며, 군인들은 MAXIM 에 열광한다. 그리고 남자들만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들의 가치관을 점점 황폐화시킨다. 농담처럼 그들은 입으로 여성을 벗기고, 지나가는 말처럼 여성의 몸매를 이야기한다. MAXIM을 보고 여성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군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상 속에서 그들은 점점 여성의 성 상품화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전역할 즈음, 그들은 20대가 가져서는 안 될 가치관을 군대에서 얻어간다. 

영장, 꿈의 불청객
-전역이 오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꿈의 나날을-

20대의 건장한 남성이라면 적어도 약 2년을 사회와 동떨어져 보내야 한다. 시기와 방법은 조절할 수 있다지만,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라고 해두자.) 입시공부의 압박에 짓눌려 있다 막 20대가 된 그들에게 2년이란 시간은 길다. 20대는 꿈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다. 2년 동안 그들은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하루를 보낸다. 따라서 그들의 개성은 상실된다. 2년이란 시간은 개성이 창출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지만, 개성이 상실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군대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시선처럼 군대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운동과 독서는 물론이고 요즘에는 대학 학점까지 이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부 그렇지 않은 사례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20대 남성에게 군대 생활 2년은 꿈과는 거리가 먼 시절이다. 애초에 선택받은 몇몇 군인을 제외하면 여건 자체가 충분하지 않은데다, 청춘 한복판의 시기에 뻥 뚫린 구멍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압박이다. 그 구멍은 너무나도 거대해, 구멍 밖의 시간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강원도 양구에서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한 H모씨는 군대는 2학년이 끝나고 갔지만 군대라는 장애물이 중간에 끼어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1,2학년을 의미 없이 보냈다고 아쉬워한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20대 남성은 대학입학과 입대 사이의 기간을 의미 없이 보낸다. 그렇게 20대는 영장이라는 불청객을 받고 차츰차츰 꿈을 잃어간다. 자신도 모르는 새.

영장, 관계의 불청객
-군바리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2년이란 시간은 어느 개인의 인간관계를 재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특히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나고, 수업시간이 맞아 밥 몇 번 같이 먹은 게 전부인 친구가 있다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연락이 끊기기 십상이다. 20대에 막 들어선 사람의 핸드폰은 하루에도 여러 명의 전화번호가 등록된다. 이십년 내내 등록한 전화번호보다 3월 한 달에 등록한 전화번호가 더 많을 정도로. 그러나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는 순간, 그 대부분의 전화번호는 무용지물이 된다. 정말 친한 사람만 남는거라며 합리화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 현상은 관계의 상실이다. 게다가 ‘군대에 다녀와서 사람 된’ 예비역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찾을 시간이 없다. 그들에게 취업과 사회는 발등 앞에 떨어진 불이다. 결국 그렇게 그들은 영장을 받고 관계를 잃어간다. 군대로 인한 인간관계의 상실은 비단 남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J모 양은 여자친구보단 남자친구들과 사이가 더 좋았는데 남자친구들이 모두 입대해버려 3학년 때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영장으로 인해 상실되는 관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말상초라는 말이 있다. 여자친구를 두고 있는 군인의 대부분이 일병 말에서 상병 초 사이에 이별을 겪는다는 군대 격언이다. 그 말처럼, 많은 군인은 이별을 겪는다. 입대 전 남자가 미안해서 헤어지는 경우, 2년을 기다리다 여자가 마음이 변하는 경우, 심지어는 2년을 기다린 여자친구가 독하다며 남자 쪽에서 헤어지는 경우까지. 많은 20대 연인들에게 군대는 최대의 고민이고 고비이다. 강원도 속초에서 근무하다 병장 때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한 L모 씨는 “입대 전까지 2년을 사귀었었고, 병장 때는 거의 4년을 향해 가는 상황이었는데 왠지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버리면 결혼해야 할 것 같다.”라는 이유로 이별을 선택했다. 20대의 이성관계에 있어서도 영장은 불청객이다.

나아진 군대가 보고 싶다.

소위 말하는 쌍팔년도 군대는 지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자살을 택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군대가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와 전근대성을 강화한다는 「당신들의 대한민국」박노자의 논리는 옳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군대에서 배웠다」의 시선 역시 틀리지 않다. 군대는 워낙 다양한 경험이 존재해 귀납법으로도, 연역법으로도 분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꿈, 관계, 가치관 면에서 20대의 불청객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분명 군대는 나아져야 하고, 나아지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20대가 즐길 수 있는 군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버틸 수 있는 군대로 변해가야 한다.

이 증 하나를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했는가



Epilogue -그리고 당신은 불청객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전역을 한다. 영장이라는 불청객을 맞아 멋지게 싸워 이긴 당신은, 전역증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위력 있는 자격증을 얻는다. 당신은 낭만의 시대는 이제 갔다는 것을 안다. 낭만 대신 당신은 이제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를 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당신은 따지지 않는다. 이름 대신 XX번 훈련병으로 호칭되던 그 때부터, 당신은 그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체 중 하나가 되었다. 섧게 울던 당신의 여자친구는 떠났다. 광활하던 당신의 인맥도 크게 줄었다. ‘병역을 마칠 자’에서 ‘마친 자’ 로 옮겨간 당신은 당신이 영장을 받기 전 자주 다니던 과방의 문을 연다. 그리고 당신은 알고야 만다. 당신 역시 고학번이라는 불청객이 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