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석을 처음 본 것은 2004년 12월이었다. 대광고내 예배선택권을 얻기 위해서 51일이나 단식투쟁을 벌였던 몇 달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건강하고 밝아보였다.  ‘학교 내 종교자유 실현을 위한 국토대장정’의 기획을 위해, 청량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사실 나는 거창한 뜻을 가지고 그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강의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강했고, 그가 생각하는 바를 직접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직접 본 강의석은 의외로 시끄럽거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했고, 말을 다 들은 후에는 자신의 의견을 차분하고 낮게 말하곤 했다. 진중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의 만남 이후 나의 고3수험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강의석이 주도하는 종교자유운동도 잠잠해지면서, 강의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관심은 멀어져만 갔다. 권투선수와 택시기사, 또 호스트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좀 다르게 특이하다는 생각만 들뿐이었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아예 없애버리자고 주장하며, ‘태환아 군대가자’라는 편지식 글을 쓰고, 국군의 날 탱크 앞에서 알몸 퍼포먼스를 벌일 때부터 나는 다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성역이나 다름 없는 ‘군대’ 에 대하여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이슈화시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성역을 건드려서 그런지 사람들의 비난은 엄청났다. 국군의 날 누드 퍼포먼스 이후 2년 반이 지난 지금, 그가 병역의 의무대신 감옥에 들어간다고 뉴스가 뜨자 사람들은 또다시 “죽어버려라”와 같은 말들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대체 강의석은 왜 이렇게 비난을 받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러한 비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튀면 죽는다

강의석이 받는 비난 중에 대부분은 대체로 그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면서, 유독 튀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그가 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차라리 사람들이 솔직하게 ‘까불어서’ 거슬린다고 말하면, 필요 이상의 욕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항상 구실을 만들고, 비난의 근거가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무차별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관심 병, 언론노출증이다.” “저러다가 나중에 정치하려고 한다.” 이런 류의 비난에서는 그의 행동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부분인지, 또는 사회가 간섭하지 않아도 될 부분인지에 대한 논쟁이 전혀 없다. 애초에 강의석에 대한 언론의 접근방식이 연예인 다루듯이 했던 것도 문제고, 사람들 역시 강의석이라는 인물을 지극히 가쉽 거리로 소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냥 “또라이‘라는 낙인을 쾅 찍어버렸다 강의석의 투쟁방식이 폭력적이라고 하기전에, 먼저 사람들의 낙인찍기 행태부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살펴보길 바란다.

 그가 다양한 일을 한 것이 왜 비난의 이유가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일반적인 20대가 봉사활동이나 여행 등 다양한 경험으로 스펙을 쌓아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에서는 20대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일단 부딪혀보라“고 하는데, 왜 그 말이 강의석에게는 통용되지 않는가? 무언가 색다른 일을 경험해보고 싶은 치기어린 마음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다. 강의석이 단순히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대중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강의석이 이런저런 일을 해왔던 것은 타인이 간섭할 부분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그가 공직에 있다거나 어떤 집단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이 신뢰를 배신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태와 많이 달랐을 뿐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 자체는 비난의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다. 다원화 사회, 다양화 사회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는 학교나 군대에서는 튀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못하는 척 해야 욕을 안 먹는 것을 알았고, 힘도 없는 애가 튀는 행동을 하면 왕따를 당하는 것도 봐왔다. 군대에서는 무난하고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군 생활을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히 남들 하는 대로, 조용히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 속에 살다보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튀는 강의석이 별 이유 없이 싫어질 수 밖에 없다.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자. 자신이 왜 강의석을 싫어하는지? 과거에 유행했던 죄민수의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아무 이유 없어!” 

이유 없는 미움을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강의석이 싸이월드에 여자 친구와 성관계 한 이야기를 썼다.” 등의 근거 없는 루머를 퍼트리는 것이다.
 


군대 폐지운동은 쇼가 아니다

강의석의 ‘튀는 행보’ 중에 가장 큰 이슈가 됐던 것은 육군의 날에 탱크 앞을 가로막고, 군대폐지를 외치면서 누드퍼포먼스를 한 것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도 아니고, 군대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마냥 이상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전 세계가 군대를 폐지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나쁜 의견은 아니었고,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동안 강의석의 특이한 행보와, 군대 문제라는 특수성이 결합되다보니까 사람들은 그의 퍼포먼스와 주장을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군대폐지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며 속칭 ‘쇼’ 를 벌이며 자기 자신을 이슈화시키고 상품화시킨다는 말들이 많았다. 언론노출병과 소영웅주의적 행태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강의석을 이제까지 비난하던 사람들은 군대문제까지 결부되니까 더욱 더 가멸차게 비난을 지속한다. 

재미있는 점은 군대를 폐지하자고 외치니까, 사람들은 대뜸 “군대를 가보고 말해라” 라든가 “지금 군대에서 열심히 군복무 하는 애들은 바보냐?” 식의 유치한 대응을 한다는 것이다. 군대를 가본 사람만이 군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여자들이나 미필자들은 군대 문제를 이야기조차 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 논리는 얼마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가? 그리고 강의석이 군대 폐지를 주장했지만 군복무를 한 사람들을 비하한 적은 없다. 오히려 ‘국가의 희생양’으로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내비췄다. 

강의석의 생각은 이상적이긴 했지만 군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우리나라의 징병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준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강의석은 육군의 날 퍼포먼스와, 앞서 육군의 날 퍼포먼스 이전에는 박태환에게 ‘태환아 너도 군대가’라는 편지글을 쓰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이렇게 이슈를 만드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을 많은 대중에게 한 번에 전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다는 것은 사회 운동에서는 일종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이 군대 폐지 운동 방식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운동, 모병제 추진을 위해 활동하는 운동의 가치를 오히려 훼손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지적은 주로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문제제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 운동을 꼭 시위를 하거나,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고 이런 식으로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방식이 딱히 효과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강의석 같은 사람이 한번 튀어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진보진영의 운동에 큰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정작 강의석이 만들어 낸 군대에 관한 이슈를 시민단체들이나 진보진영 쪽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강의석에 대한 비난 여론이 워낙 크다보니까, 오히려 강의석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군대문제를 제대로 이슈화 시키지 못한 것이다.

강의석은 결국 신념에 따라 군대를 안가고 감옥에 갔다.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결코 쇼가 아니었다. 그는 불가능한 이상을 말할지언정 위선자나 기회주의자 부류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군대를 정말 안 간다고 하니까 진정성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국민의 권리는 누리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마침 대한민국 헌법은 제5조 제2항에서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를 국군의 신성한 의무라고 규정하고 제39조 제1항에서 국가안전보장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에는 제19조 양심의 자유 보장과 제10조 국민의 행복추구권 보장 역시 명시되어있다. 어떤 사람들은  집총을 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양심에 어긋나고, 군대에 가는 것이 자신의 행복추구권에 반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하고 감옥에 가면서까지 입영을 거부하는 것을,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욕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소수자의 신념과 양심을 존중해주지 않고 범죄자로 만든 사회를 탓해야 하는 것 아닐까?
 


강의석에 대한 재평가
 
그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남다르게 튀는 모습, 평화에 대한 ‘근본적 이상주의’, 그리고 강의석 개인에 대한 루머가 뒤섞이면서 생긴 오해와 편견은 이제 거둘 때가 되었다. 

강의석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고집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강의석 개인의 행적과는 별개로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종교자유와 군대 폐지에 대해서 주장해왔고, 이 점은 분명 인정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종교, 군대등 한국사회에서 쉽게 말하기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 역시 용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투쟁 방식이 과격하고, 언론 노출을 고의적으로 노린다고 해서, 그가 말하는 메시지들을 하찮다고 여기면 안 된다. 교내 종교자유와, 군대 폐지 운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최소한 강의석에 대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는 꺼내는 것은 그만했으면 한다. 물론 강의석 개인과 강의석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기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언론과 대중이 강의석의 행동을 단순히 ‘튀는 행동’ 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버려서, 강의석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의 가치가 마냥 폄하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그의 메시지와, 사회운동가로서의 활동에 더 주목 하는 것이 그를 제대로 평가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군대를 없애자는 생각은 사실 ‘평화를 외치는 순수한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극대화시켜서 표출한 것이다. 더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이야기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너무도 관대하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 주장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만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강의석의 과감한 문제제기에 대한 우리의 현실적인 응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