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한 동영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인천에 위치한 모 중학교의 선생님이 학생에게 구타 수준의 체벌을 가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것이다. 수 십대의 뺨을 때리고 성추행으로 의심되는 특정부위 구타까지, 체벌의 수준은 상식 그 이상이었다. 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을 논할 필요도 없이 이 교사의 체벌행위는 형사처벌 감이라며, 징계와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논란이 가열되자, 해당 학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교사에게 직위해제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잘 되었다고, 이런 사람은 교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며 직위해제 처분 뉴스에 환호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네티즌의 예상과 달리 그 교사는 교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다. 직위해제는 ‘징계의 효과는 있지만 징계 자체는 아니며 공무원의 신분은 유지’하는 처벌이다. 즉, 단기간 직위를 해제하는 것일 뿐, 다시 ‘직위해제’가 해제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있다. 직위해제로 네티즌의 관심이 수그러든 후, 해당 여교사는 최종적으로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지난 6월 20일 열린 인천시 교육청 교육공무원 징계위원회는 여교사 본인이 교사로서의 품위를 훼손했지만, 학생지도 방법이 잘못된 점을 인정하여 정직 3개월이라는 징계를 내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클리셰와 같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 결국 문제는 다시 제자리로

 연속된 이 사건의 흐름에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 내재되어 있다. ‘교사나 공무원과 같이 국가의 녹을 받는 사람이 처벌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다 → 인터넷에서 분노의 여론이 들끓는다 →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어떠한 종류의 처벌이 내려진다 →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진다 → 해당 공무원은 결국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여론의 힘은 막강하다. 그 동안 우리가 모르고 지나칠뻔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언론에 의해 발견되고 또 여론에 의해 재발견됨으로써 바로 잡힐 수 있었다. 여론이 자칫하면 아무런 처벌도 행해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공무원들의 잘못을 심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건들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어물쩡 넘어가고 만다. 사건을 유발한 구조적인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해당 공무원에게 처벌이 내려지지만, 그 처벌이 공무원이 저지른 잘못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솜방망이 징계’는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결국,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여론이 직접 공무원 사회를 압박함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된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그리고 데자뷰를 일으키며 수없이 반복된다.




여론을 이끄는 동력, ‘분노’가 문제를 단순화 시킨다


 이런 일은 왜 발생하는 것이며, 어떠한 이유로 반복되는 것일까? 근본적인 문제는 여론을 이끄는 동력이 바로 ‘분노’라는 점에 있다. ‘분노’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파도처럼 일어나 불길처럼 번진다. 공무원 사회의 부도덕이 언론에 의해 알려지면 순간 여론은 분노로 들끓는다. 분노의 얼굴을 한 여론은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을 가할 만큼 강력하다. 이번 ‘여교사 체벌’ 사건에서도 해당 여교사에 대한 네티즌의 분노가 여교사에 대한 처벌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분노는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회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지, 구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에 토론과 논쟁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감정적인 격분과 울분은 감정적으로 처벌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분노는 그렇게 사건을 단순화시킨다. 문제를 초래하는 제도나 구조를 개혁하기 보다는 해당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게 징벌적인 무언가가 행해지길 바라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공무원에게 내려질 수 있는 처벌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지식도 얻지 못하게 된다. 그 문제가 구조적으로 해결이 되었는지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단지, 처벌의 유무만을 중요시하게 될 뿐이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해당 공무원에게 징계를 내리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것은 이 점에서 연유한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공무원 사회는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해결책을 궁리하고 실행하는 데에 소홀한 경우가 많다. 대신에, 해당 공무원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시키려 한다. 심지어, 그 처벌이 잘못에 합당하지 않기도 한다. 여론의 본질이 분노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보여주기식 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여론의 불만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는지, 징계로 끝을 맺었다손 치더라도 그 징계가 합당한지에 대한 문제의식은 피어 오를 새도 없이 사건은 일단락 되고 만다.

 이번 인천 여교사 체벌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여교사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졌다는 소식 하나에, 여론의 관심은 뚝 끊기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분노는 사건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이번 사건에서도 분노는 ‘처벌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제를 단순화 시켰다. 결국, 어떤 내용이건 간에 처벌은 처벌인 무언가가 행해졌다는 사실에 비난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폭풍처럼 밀려들었던 관심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매일 매일 새로운 사건, 사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개중에 자주 봐오던 익숙한 패턴의 사건들이 눈에 띈다. 뇌물을 준 하청업체에 사업권을 몰아준 공무원, 허위 출장비로 세금을 허투루 쓴 공무원 등 데자뷰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수두룩하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난다. 하지만, 분노하기 전에, 자문해보자. 여론이라는 이름의 우리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무조건적인 아우성만 내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화를 식히고, 이성적으로 바라보자. 가려져 있었던 어둠이, 잡히지 않았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