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고함 20입니다. 이번 주부터 한 주 동안 화제가 됐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주의 인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다음주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니,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 이 글은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쓴 글입니다. 무작정 비판하기 보다는, 인류애!적인 마음에서 그저 안타까움!에 쓰여진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오세훈이라는 이름에, 그의 변호사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맞다. 그는 변호사였다. 그것도 잘나가는! 변호사 시절의 오세훈은 “사람 좋은 변호사”의 이미지를 풍기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전문직 스타시대를 이끌었고, ‘신세대 지식인’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천상 정치인이다.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닦으며 투표를 호소한다.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극에 달한 지금, 갑작스레 든 의문. 아저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였잖아요!


90년대 변호사 시절의 오세훈, 그의 리즈시절?

 오세훈의 변호사 시절은 가히 그의 “리즈시절”이라 불리울 만하다. 당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세훈은 환경문제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93년 인천 북구 경남아파트 주민 3백여명이 아파트 시공업체인 경남건설을 상대로 낸 일조권 침해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이끌어내면서부터다. 환경운동연합 부설 시민법률상담실에서 무료 법률상담을 했으며, 대한변협 환경문제연구위원, 서울시녹색서울시민위원회감사, 수도권매립지운영관리조합 고문변호사를 맡기도 했다.

 9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한 그는 특유의 매력을 발휘하며 비방송인의 전성시대를 이끈다. 보통 변호사라면 냉철하고 차가울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진 보통 사람들에게 오세훈 변호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감형 외모에 부드럽고 편안한 매력은 대중에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가지고 있던 신세대 이미지는 “개혁적”, “새로움”의 느낌을 주었다.

 방송은 이런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였다. 재미뿐만 아니라, 공익성까지 함께 추구하고자 했던 당시 방송계의 흐름에서 오세훈 변호사는 방송을 이끌기에 적격이었다. 그는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부드럽고 편안한 이미지로 웃음을 유도했다. MBC TV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 진행을 시작으로, KBS2TV 「그때 그 사건」의 공동 MC, SBS TV 시사토크쇼 「뉴스 따라잡기」, 「그것이 알고싶다」 등 다수의 TV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방송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95년 출간한 그의 에세이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싶다」는 대중의 인기에 힘입어 종합베스트 셀러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1997년 6월 4일 동아일보 기사

1995년 10월 29일 경향신문 기사



 “옷맵시가 멋진 신세대변호사,” “전문직업인이면서도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주는 방송 MC.” 맞다, 그는 이런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전문직업인임에도, 인간적 면모를 내뿜던 이미지. 호감형 외모에 부드럽고 편안한 매력을 가진 신세대 지식인. 오세훈은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공적으로 활용하면서, 올바른 공익적 이미지를 쌓아갔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그의 커리어도 변호사, 방송인, 그리고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지식인으로 확대되었다. 96년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성(상)부문에서 이병헌을 제치기도 했으며, 같은 해 뉴스메이커가 중앙 일간지 기자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트 조사에서는 멋있는 남성 10위권에 뽑히기도 하였다. 이런 조사 결과는 당시 그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 때가 그의 리즈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오세훈 아저씨가 달라졌어요!”

 그랬던 그가, 달라졌다. 16대 국회의원 시절과 다시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던 시절을 거쳐 그는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연임했다. 지난 6년동안의 서울시장 활동기는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다. 당시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오세훈의 별명만 봐도 그렇다. “다섯살 훈이 (5세 훈이), 오잔디, 강남시장, 오세이돈”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지나치면서 그는 단결된 지지세력만큼이나 두터운 안티를 거느리게 되었다.

 처음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초기만 해도, (적어도 필자의 눈에) 오세훈은 그저 서울시장직을 맡고 있는 공무원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전에 갖고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는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세훈은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용산 참사로 6명의 목숨이 세상을 저버려도, 입 한번 뻥끗하지 않았다. (서울 시장 재선 시에 이미지 타격을 우려해서 였을까.) “디자인 서울”과 “한강 르네상스”라는 철학 없는 토건 사업에 막대한 혈세를 탕진했다. 환경 문제 전문 변호사라는 예전의 직함이 무색할 정도로 서울과 한강은 군데군데 파헤쳐졌고, 내가 살던 서울은 전통과 정겨움이 사라진 회색 도시가 돼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에 거대 물폭탄은 연거푸 떨어졌지만, 대책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오세이돈 패러디물



 결정적 순간은 21일 일요일이었다. 무상급식 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훔치는 순간, 그는 명실상부 정치인이 되었다.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것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의견이다. 그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24일 치러질 투표에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걺으로써, 정책 투표를 정치 투표로 전락시켰다. 아이들이 연관된 교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변질시킨 것이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술수를 부리는 그가 흘리는 눈물은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열연덕분에 지금 사회는 무상급식 범위에 대한 생산적 토론이 아닌, 오세훈 개인의 거취에 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복지에 관한 열린 토론은 차단되었고, 온통 오세훈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면서, 오세훈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문득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오세훈이라는 사람이 맞는가? 그가 나오던 프로를 보고, 그가 냈던 책을 읽으면서 정립해온 그의 이미지를 떠올려봤을 때, 동명이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괴리감은 엄청났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개혁적인 신세대. 전문지식을 공익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인간적인 사람… 의 이미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 좋은 변호사”의 이미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정치인”으로서의 오세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천상 정치인으로 진화한 오세훈을 보며 21일의 눈물이 고도의 정치적 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한강르네상스, 디자인 서울 등 토건사업에 탕진한 혈세, 비리에 관한 각종 의혹,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책임을 뒤로 한 채, 이번 투표를 핑계로 도피하고자 하는 정치적 술수는 아닐는지 말이다.


  

이미지 출처; 한경닷컴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없고, 불가피하게 적을 둘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치인의 운명이라 한다. 엄청난 반대세력을 두고 있는 그는 이제 엄연한 정치인이 되었다. 정치인이라고 명명하는 것마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예전 오세훈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변신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가 사람을 망쳐놓은 것일까? 그런데 아마 아닌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실제로 오세훈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 채, 방송을 통해 비춰지는 이미지만을 소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의 그 좋았던 이미지를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것 조차도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겠다. 오세훈은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국 변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오세훈은 정치인으로서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제 2의 인생은,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오늘, 그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