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청춘들이 개새끼가 되어 가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기존의 ‘20대 개새끼론’은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들의 세태를 비판한 담론이었다. 이 때의 개가 ‘개만도 못하다’의 부정적인 개라면, 이번의 개는 ‘개팔자가 상팔자다’의 하릴없는 개다. 왜 갑자기 개새끼냐고? 병맛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는 ‘병맛’을 둘러싼 언론들의 분석 이야기다.

‘병신 같은 맛’이라는 의미불명의 말이 줄어들어 생긴 단어가 병맛이다. 처음 이 단어는 어떤 컨텐츠의 질이 안 좋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병맛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하나의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심하게 질 떨어지는 컨텐츠를 두고 비난하던 단어가 병맛이었다면, 이제 몇몇 분야에서는 병맛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현상에는 분석이 따르는 법이고, 병맛 역시 예외는 아니다. 병맛 열풍을 분석한 언론기사의 제목을 보자.

병맛의 대명사, 이말년씨의 웹툰.

[만화로 보는 세상]병맛 만화, 루저문화, 청년문화 <전자신문> 2010.4.23일자
병맛 만화, 루저들의 코딱지를 후벼주는 맛! <한겨레21> 제 805호 (2011.4)
잉여 청소년들의 ‘잉여’짓 반란 <경향> 2011.8.1일자
‘병맛’웹툰…‘잉여’세대의 발칙한 반전 <한겨레> 2011.8.4일자
우울한 청춘들 달구는 ‘루저’ 웹툰 둘 <중앙> 2011.8.17일자
창의적 ‘잉여 문화’가 뜬다 <주간한국> 제 2388호 (2011.8.23)

대동소이한 제목이다. ‘잉여’, ‘루저’ 등의 단어가 눈에 밟힌다. 그런데 이 기사들의 제목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나, 언론들은 병맛이라는 현상이 청년층에서 시작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둘, 그리고 언론들은 우리 청춘이 암울한 상황인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세 번째, 그들은 병맛=루저=잉여=청춘으로 도식화 시키고 있다.

어지간히 불쌍해 보였나 보다. 그리고 어지간히 할 일 없어 보였나 보다. 엄정함을 자랑하는 신문에서 잉여라는 단어를 보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잉여라는 단어가 ‘세대’라는 명사 앞에 붙게 되는 꼴을 볼 줄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과히 기분이 좋지는 않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해도 불편함이 남는 마당에, 꼰대들로부터 잉여 소리를 듣는 것이 고까울리 있겠는가.

기사의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병맛 만화’의 배경엔 젊은 세대의 ‘경쟁 스트레스’가 있다]<중앙>, [자기 비하가 강한 루저 문화가 병맛 만화를 이끌어냈다]<한겨레21>, [댓글을 달고 퍼나가는 행위로 서로의 잉여 열정에 용기를 주고 긍정하는 젊은이들의 행동은 서로 잉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상호 인정’의 몸짓]<경향> 등이다. ‘잉여 열정’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내며 병맛 현상 분석을 한 것은 웃어넘긴다 치더라도, 병맛이라는 현상에서 경쟁과 자기비하까지 이끌어 내다니, 이거야 말로 병맛이다.

우리는 정말, 잉여인가.

물론 필자도 ‘병맛 웹툰’을 자주 본다. 그러나 자기 비하와 병맛 현상이 맞물려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병맛에는 유쾌함이 있다. 스토리 위주 웹툰에 달게 되는 ‘작가님 정말 천재인듯……’이라는 댓글보다는, 그저 ‘으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유쾌함이다. 나처럼 대부분의 청춘들은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에 병맛을 즐긴다. 만약 언론의 분석처럼 병맛이 소위 ‘잉여 세대’의 세대론적인 현상이라면, 병맛 컨텐츠는 웹툰에만 머무르지 않고 좀 더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웹툰이나 유머글을 제외한 장르에서 병맛을 테마로 잡은 컨텐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몇몇 노래 가사가 병맛 가사라 불리고 있지만 설마 “갈비뼈를 타고 날아가고 싶다.”는 가사에서 경쟁과 루저 문화를 이끌어낼 능력자는 안 계시겠지.

또 병맛 웹툰이 떠오르고 있다곤 하지만, 서사가 있는 웹툰의 인기가 가라앉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스토리 위주의 작가 강풀의 작품은 여전히 가장 있기 있는 웹툰이고, 인기 있다는 병맛 웹툰 역시 전체가 병맛으로 채워져 있기 보다는 서사를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병맛적 요소를 넣어 유머를 강화한 웹툰이 많다. 청춘들이 새로운 유머 형태로 병맛을 받아들였다 뿐이지, 언론들의 분석처럼 ‘경쟁과 자기 비하에 찌든 잉여 세대’로서 병맛을 선택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 병맛을 분석하려면 차라리 이 사회를 들여다보라. 요즘들어 병맛 웹툰보다 이 사회가 더 재미있다. 좀 더 과격히 말하자면, 사회가 더 병맛이다. 사회가 그렇다보니 일간지들의 만평과 만화도 가관이다. 8월 25일자 <경향>의 만화, ‘장도리’는 무상급식이란 풍차를 망국포퓰리즘이란 괴물로 잘못 보고 달려든 ‘오세이돈키호테’가 괴물에 패배해 ‘한나라당’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또 8월 24일자 <한겨레>의 ‘그림판’에는 ‘무상급식 못 막으면 동성애자 급증하니 말세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전형적인 병맛 웹툰의 전개와 대사다. 어디, 이런 만평을 보고도 잉여 세대 운운하시겠는가.

@8월 24일자 한겨레신문

물론 이런 언론 분석이 청춘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청춘이 ‘루저’가 되고 ‘잉여’가 되는 것은 이 사회 때문이라며 동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싸구려 동정은 언제나 ‘병맛=루저=잉여=청춘’이란 편견 섞인 도식을 전제로 한다. ‘잉여 세대’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언론이 청년에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노도 열정도 모르는 20대여, 난 너희를 포기한다.”라는 글은 구(舊) 20대 개새끼론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할일도 비젼도 없는 20대여, 난 너희가 불쌍하다.”라는 병맛 현상 분석이 신(新) 20대 개새끼론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