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등장하는 ‘리스트’란 ‘대학에 진학하면 하고 싶은 리스트’이다.


야자실에서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대학에 진학하면 하고 싶은 리스트를 적어 내려갔다. ‘동아리 활동하기’, ‘독서토론하기’,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만나기’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목록을 써내려가면서 괜시리 마음이 뿌듯해졌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대학 진학 후 리스트에 쓴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어서 빨리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만 커져갔다.

그렇게 입시가 끝이 나고 부푼 꿈들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컸다. 하고 싶어서 들어갔던 봉사 동아리는 ‘친목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술만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고 독서토론은 같이 할 사람부터가 잘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동기들은 ‘고등학교 때 그렇게 억압 받았으면 됐지. 이제는 놀 때야’라며 놀기만 했다. 서로의 치기어린 생각을 나누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힘들었던 고3생활을 버티게 해준 리스트를 실행할 수 있는 대학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렸던 대학은 유토피아에만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졌다. 결국 디스토피아에 살아가기 위해 부푼 마음으로 그렸던 대학의 모습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렇게 현실에 수긍했다. 그러던 중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고등학생들은 어떤 리스트를 가지고 있을까?’

고등학생들의 리스트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명의 학생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서울권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어떤 학생은 소위 8학군이라는 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어떤 학생은 뺑뺑이로 걸린 학교가 싫어서 울기도 했다고 밝혔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고 다른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리스트는 존재 했다.


해외봉사, 여행, 알바....하지만 미팅부터!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김모군과 유모군은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은 많지만 미팅이 제 1순위라고 말했다. 김모군은 대학가면 예쁜 여자가 많을 것 같아서라며 미팅을 하고 싶은 이유를 밝혔다. 옆에 있던 유모군은 미팅을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이유를 모호하게 말했는데 새롭게 바꾸고 싶다고 했다. 바꾸고 싶은 것이 대상인지 외모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서 공을 굴리는 듯한 손동작과 함께 바꾸고 싶다고만 말했다.

뺑뺑이로 걸린 학교가 싫어서 울었다던 김모양은 대학가면 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 고민이라고 했다. 그녀는 해외 봉사부터 미팅까지 쉬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했다. 그러고는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대학에 가서 ‘나쁜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리스트 소개를 끝냈다.


하지만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고 실행하는 거죠...


대학이 브랜드같이 느껴진다는 김모군은 서울의 한 중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권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라면 3수도 불사할 것이라 했다. 서울 소재 대학 2캠퍼스에 다니던 누나가 편입을 해서 서울로 올라온 것을 예로 들며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편입도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췄다. 이런 노력들을 해서라도 대학의 이름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리스트를 실행하는 것은 서울권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의 일이라고 했다.

소위8학군 고등학교를 다니는 유모군은 예전에는 대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과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서울권대학 진학이 간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키워주신 할머니를 위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모양은 앞서 말했던 자신의 리스트들이 실행되기에는 한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대학은 아무래도 이름값이 있으니까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또한 중앙은행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등록금이 나오기 때문에 등록금을 위해서 서울권 대학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학교에 진학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도 리스트는 있지만....

졸업 고등학생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21C. 대학 합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학생들은 누군가의 의해 매겨진 대학의 순위를 알게 된다. 그 순위에 따라 편견의 시선과 연민의 눈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좀 더 높은 순위에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다른 활동은 생각도 하지 않고 공부에 매달린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은 대학 진학 후로 미뤄 놓는다.

미팅이 제 1이라던 김모군과 유모군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은 김모양까지 만나 본 고등학생들 모두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리스트에는 조건이 필요했다. 서울권 대학 진학이라는 조건 말이다. 이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리스트를 유예시킬 것이다.

리스트를 그리는 데에 있어서도 대학의 서열이 느껴지는 고등학생들의 답변에 씁쓸했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들어만 줄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마지막으로 실은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했던 끝인사보다 '더 많은 리스트들을 꿈꾸며 살아'라고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