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이를 보고 같아지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못한 이를 보고 안으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라는 공자님의 말은 사람이라면 살면서 여러 번 생각하게 되는 문제다. 자신을 가장 잘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언제나 ‘남’을 척도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남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은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남의 허물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습관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 달콤한 수단에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XX녀

  ‘XX녀’, 'OO남'이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개념 없는 청년들, 20대 초반의 학생들도 “요즘 아이들은…”으로 시작하는 말을 달고 사는 세태. 이러한 현상은 현 세대가 그 이전 세대들보다 더 문제가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위로와 만족감을 위한 것 뿐이다. 이것을 위해 비난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도피처이다.


  삶은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좌절의 연속이다. 경쟁사회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오직 소수이고 나머지는 박탈을 느낀다. 사람들이 자신이 경쟁에서도 밀려났고 경쟁 속에서 인간적인 성품까지 일부분 포기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즉 나는 너무 평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실패를 경험하는 것보다도 더 두려운 좌절을 맛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든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무기한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이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경쟁 자체를 뛰어넘어 초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찾고 부각시키는 것이다. 비난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됨됨이의 나쁜 정도가 더 깊을수록 자기 자신의 위치는 높고 안전해 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척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부도덕한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는 중간이나 그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적당한 만족감이 마음을 데우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

  "키가 180cm가 되지 않는 남자는 루저"라고 방송에서 이야기 했다가 '루저녀'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루저녀'라는 외모지상주의의 극단적 아이콘을 만듬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덜한 자신들의 외모를 따지는 습성은 쉽게 합리화 할 수 있게 되었다. '루저녀'를 거울삼아 평소의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허물을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이 편안한 방법에 매혹될 뿐이다.

 


   XX녀는 그 대표격일 뿐이다. XX녀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습관에 젖어있다. 하루에도 길에서, 인터넷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평가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위안을 얻는다. 유행지난 옷을 입은 사람,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을 자꾸 높고 안전한 곳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습관은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는데도 문제가 있지만 자신을 사회의 일반적 기준에 맞게 행동하게 한다는 족쇄가 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남을 사소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남들의 사소한 평가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예수님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라고 했을 때 문자 그대로 죄가 없는 사람은 돌을 던져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공자님 말씀처럼 남을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을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 아닐까. 위의 공자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모두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