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008년 [현대시]에서 ‘나무 라디오’외 네 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는 문학과 지성사의 2011년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스물하고도 다섯. 그는 이이체다.

짙어지려는 초록을 시샘한 바람이 겨울의 자리를 쉽사리 내어주지 않으려던 3월의 중반, 세상의 모든 바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두툼히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나타난 그와의 시간을 적는다.

 

25살의 시인, 이이체


그, 시를 만나다

유희경, 최정진등 또래 시인들과 비교해도 그는 어리다. 어린 나이에 등단한 비범함에는 남다른 유년 시절이 숨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다양한 시들 사이에 파 묻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을 거라고 쉽게 짐작해 봄직하다. 하지만 어렸을 적, 그는 시와 친하지 않았다. 그나마 읽은 이해인, 원태연시인의 시는 그에게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어렵고 심오한 것이 시라면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험생’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고등학교 3학년 때 마주한 기형도시인의 시집은 달랐다. “원래 언어는 기호잖아요. 그 기호는 넓게 보자면 기표(소쉬르의 기호 이론에서,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외적(外的) 형식을 이르는 말)와 기의(소쉬르의 기호 이론에서, 말에 있어서 소리로 표시되는 의미를 이르는 말)로 나뉘는데 그 기표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너무 달라요. 그리고 그 기표가 투사하고 있는 기의라는 것도 천차만별이에요. 특히 예술 언어로 가면 더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기형도를 읽었을 때 쉽고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흔히 보편적으로 말하는 감동하고는 제가 약간 거리가 있는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긴 해요.”

그는 기형도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에서 ‘보통 것’보다는 두드러진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시에 대한 달라진 태도가 시를 쓰는 행위로 이어졌다. “제가 시를 2007년 봄에 처음 시작했어요. 그런데 등단을 2008년에 했거든요. 1년 반 만에 등단을 한 거에요. 너무 이르게 한 편이죠.” 가히 폭발적인 생산성이라 느껴진다.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1년 반 동안 시집을 천권을 읽었어요. 약간 과식을 한 셈이죠.” 


“시에서 결핍들을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세상의 바깥 것에 힘들 때마다 시에 의지 했다는 이이체씨.

 

시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는 점점 그 속으로 잠식했다. 외부의 여건들은 그를 더욱 시에 다가가게 만들었다. 그는 가난한 대학생이었고 연애 중이었고 대학에 실망했었다. “속되게 말해서 가난했어요.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편의점 폐기를 먹거나 아니면 라면을 먹었어요. 그런 정도로 돈을 잘 못 벌고 있는 상태였고 그만큼 많이 힘들어서 시에 많이 매달리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일단 정신이 힘드니까 몸도 많이 힘들게 되고, 그런 결핍들을 시에서 찾았던 것 같아요. 시에서 만족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시를 정말 많이 읽고 정말 많이 썼어요. 하루에 시집 한 권, 기본적으로 읽었어요.”

육체와 영혼 모두가 힘들었을 당시, 그는 연애 중이었다. 자신이 번 돈을 여자친구에게 쓰기위해 친구들의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흔한 말로 관용어구처럼 쓰는 말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어떤 사람과 연애가 끝나고 나면 그 사람과의 연애한 시간만큼 잊는데 시간이 걸린다.’ 많이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게. 연애라는 게 많이 영향을 끼친 거 같고. 저한테는 특히 더 그랬던것 같아요. 제가 쓴 시의 대부분이 다 사랑시라서.” 그 사랑은 그의 작품에 큰 흔적을 남겼다.

“아직도 잔상이 남아 있는 거 같아요. 그 연애가. 그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집 뒤에 표사에다가 그런 구절을 썼는데, ‘사랑이 헤어진다고 해서 이별한다고 해서 잊거나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그냥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랑은 늘 하고 있어요. 헤어진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연애가 끝난 거죠. 그 건 단지. 그래서 사랑은 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무렵, 그가 지니고 있던 대학의 이미지는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현실이라 여겼던 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실망은 나타났다. 그는 학교에 대한 실망과 기대를 시로 옮겼다. “학교생활에 회의가 좀 있었는데 그게 아마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많이 옮겨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시를 쓰면서 많이 회복을 했던 것 같아요. 시를 쓰는 것이 수많은 나 자신들과 토론을 하는 일이고, 그런 것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렇게 그는 시와 점점 틈을 좁혔다.

시는 육체적으로 붙어있는 것, 하지만 전혀 나의 것이 아닌 것

 

 

<죽은 눈을 위한 송가> - 이이체

 

등단 직전에 그는 시를 쓰기 위해 휴학을 했다. 많으면 하루에 3편의 시를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렇지만 그렇게 써내려간 작품들은 쉽게 세상에 내보내지 않는다. “저는 시를 한 3시간 만에 한 한편을 이렇게 뚝딱 써요. 그래 놓고서 그거를 심지어 일 년을 묵히는 경우도 있고 이년을 묵히는 경우도 있어요. 이년 동안 묵힌 시를 발표한 적도 있어요. 최근에는.” 여러 번 걸러내는 것이다. 보고 또 보는 습작의 과정을 거쳐 시를 가다듬는다.

그러다보니 그는 언제나 시와 함께 한다. 그에게 시는 외부의 텍스트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붙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세상에 선보임과 동시에 그와 분리된다. “본인의 글이 속되게 까이면 우는 친구들이 있어요. 저는 그 친구들한테 왜 우냐고 그래요. 울지 말라고 니가 울 일이 전혀 아니라고. 우는 것은 자기 작품을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자의식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저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네가 버린 자식이니까 많이 두드러 패고 많이 욕하라고 침 뱉으라고 해요.”

“사실 저는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어떤 말이라도 틀린 말 같진 않다’라는 생각 때문에. 또 제 시를 남의 자식으로 보는 맥락이 함께 겹쳐서 막 누가 내 시를 욕 하면은 ‘아 그런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시에 대해서 어떤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지목하는 평론이 있다고 해도 기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그 사람만의 비평관과 작업이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 제가 폄하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사람의 말 자체도 텍스트도 긍정적인 취지를 보려고 하지 부정적인 취지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람의 취지가 좋은 의미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손을 떠난 것에 미련이 없다. 오랜 시간 그의 세계 안에 영위하다 대중들에게 선보여지는 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감정의 폭으로 진동하지 않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렵고 전위적이라고 말하는 혹자들에 대해서도 담담하다. 소통을 생각하지 않고 시를 쓴다는 말, 정신분열증적으로 시를 쓰냐는 말, 쉽게 시를 써야 한다는 말, 그는 이런저런 말들을 사뿐히 지나친다.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가 표현하고자하는 인간의 감정이 그만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시가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감정들, 느낌들, 표현들이 전부다 하나하나 표현될 수 있다면 우리가 굳이 왜 싸우고 왜 굳이 시나 소설이나 이런 다른 예술 언어로 표현하겠어요. 그게 표현이 잘 안되니까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표현도 해보는 거죠.”

“왜 소통을 생각하지 않냐고 우려하시는 분들의 의중도 십분 이해하지만, 저는 그래요. 소통의 양보다는 소통의 질을 생각하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거든요. 하지만 소통의 질을 생각한다고 해서 소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소통을 생각하는 방식과 형식이 다른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좀 더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남들이 한 번 생각할 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면 그게 좀 다른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양과는 다른 맥락.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제 시는 그중에서 굉장히 쉬운 편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시집은 언제 쯤 만나 볼 수 있을 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르죠. 너무 이르죠. 이제 시집 낸지 얼마나 됐다고. (웃음) 너무 이르죠.”라고 답했다. 한동안은 학업에 열중하고 싶다고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지 않아 그를 만나 볼 수 있을 듯하다. “글쟁이가 자기 장르만 쓰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산문집을 쓸 수도 있는 거고. 여러 방면에서 텍스트의 수용자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이이체


잊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연꽃 아래서 피어나는 주검

무너진 밤은 밝고, 설익은 해는 색을 지운다
어제 태어난 잠이 오늘
눈 뜬다

어떤 우주에서만 흐르지 않는 숨이 있었다

저무는 눈가에는
누군가가 등불 없이 스산하게 잦아든다

풀꽃들이 암수를 알 수 없는 음양을 가졌다

향을 피우지 않고 춤추는 여승들과
폐허
폐허
폐허의 허물

도시는 허물을 벗고 기어 다니고 있는 것

어느 길에서든 간단하게 헤매이면서, 누구도 시린
눈을 죽일 수 없었다

나무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숲
칼의 뼈

흉터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는 색을 보듬고

이형(異形)의 인생이
마르지 않는 강가에 이르러 눈을 씻는다

피와 눈물

피와 눈물


<죽은 눈을 위한 송가>를 표제작으로 삼게 된 이유는

원래보통은 자기 시구(詩句)나 시 제목을 표제작으로 삼곤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아예 새로운 단어 하나를 찾아내려고 했어요. ‘징후’라는 단어도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징후’라는 단어가 확장적으로 갖고 있는, 발산하고 있는 힘이 대단하고 생각을 했고, 그 힘이 제 색깔하고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굳이 그 쪽만 고집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실외투증후군>등 여러 개의 제목들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원래 첫 시집은 무엇보다도 조어가 좋다고 생각했어요. 단어 하나 보다는 그게 인상이 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이쪽을 선택하게 된 거에요. 궁극적으로는 이 시의 전체적인 외연이 제 시들의 전체 외연을 다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표제작으로 선택을 하게 된 것이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