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는 왜 ‘남성’과 더 엮이는가? - 심리학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이, 포르노도 남성이나 여성에게 배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찾고자 하면 포르노를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포르노는 남성이 더 많이 보는 것으로 이해되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성욕보다 강하다는 증거일까? 그보다는 포르노 자체가 남성적이라고 보는 편이 실제에 가까울 것이다.

로라 멀비는 유명한 저작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를 통해 기존의 대중영화의 남성성을 밝혔다. 남성 관객은 극중 남자 주인공에 대해 상상적인 동일시를 느껴, 주인공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신체를 포착한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시각적인 쾌락을 느끼게 된다. 이는 영화의 시각적 양식 자체가 남성에게만 배타적으로 쿨레쇼프 효과(영화에서 관객이 인물의 시선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를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들은 영화 속 여성 인물을 대상화하여 보는 자의 위치에서 절시증(scopophila, 관음증)적 쾌락을 느끼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영화 속 남성 주인공에게 자신을 동일시하여 나르시시즘(Narciscism)적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대상화되어버렸을 뿐인 여성 인물에게 동일시할 수 없는 여성 관객들에게는 보는 자의 위치가 허락되지 않는다.

포르노는 대중영화의 남성 편파성이 극대화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포르노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 다루어지는 존재이며,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대상화된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포르노에서 여성 등장인물들은 남성 등장인물의 요구에 맞추어 행동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은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포르노물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장면, 자신의 애인을 다른 남성이 범하게 하는 장면, 여러 명의 여성과 한 남성이 동시에 관계를 갖는 장면 등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식의 선을 벗어난, 그러니까 즉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들이 모두 펼쳐진다. 이러한 포르노는 남성에게는 큰 만족감을 주지만, 여성에게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만족감을 느끼고, 모든 여성이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확률상으로 남성이 더 만족할 것이다.)

로라 멀비는 자신의 이론에서 남성적 시선을 담지하고 있는 기존의 대중영화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대신, 남성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안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라 멀비의 이론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남성적 포르노’들을 파괴해야 하는 것일까? 글쎄다. 여성들에게도 여성적 시선으로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문화 장르가 있다는 점이 떠오른다. 바로 여성들의 취향에 따라 남성 존재들이 대상화되어 나타나는 ‘팬픽’이나 ‘야오이(여성들이 창작하고 여성들이 즐기는 남성 동성애물)’ 문화 같은 것들이 그렇다. 포르노가 남성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면, 야오이는 여성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그럼 남자나 여자나 쌤쌤, 평등한 것이냐고? 다시 한 번 글쎄다. 남성이 ‘난 야동을 본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자신이 건강한 남성임을 드러내는 묘하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만, 여성이 ‘난 야오이를 본다’고 말하는 건 자신이 변태임을 드러내는 묘하게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주류 미디어에서도 포르노는 다뤄도 야오이는 다루지 않는다. 야오이가 포르노에 비해 훨씬 더 음지에, 아직까지 성역에 있다는 이야기다. 거 참, 진정한 남녀 평등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포르노를 허하라 - 현대사

프랑스 대학생들이 주도한 68혁명의 주제중 하나는 ‘성의 해방’이었다. 그들의 외침이 기성세대의 정치와 관습에 대한 반란임을 생각해 볼 때 ‘성의 해방’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특히 여성에게 그 의미는 각별했다. 성적인 약자이며 성적 억압을 받아왔던 여성에게 68혁명은 페미니스트의 결집을 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여성의 성性이란 존재는 언제나 억압 받기 쉬운 존재였고 심지어 일종의 재화로 취급되었다. 이 남성주의적 관념은 포르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재 소비되는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중심적이며 이는 여성들이 아직도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주권을 잡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성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보면 현재의 구조는 기형적이다. 포르노에서 보이는 마초적인 남성의 모습은 여전히 혁명이전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 포르노가 음지에 머물러 있는 한국은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다. 모든 종류의 음란물의 배포, 수입이 금지된 이 나라는 성인물뿐만 아니라 성산업 자체가 지하경제를 이루고 있어 성性에 대한 여성의 참여를 논하는 담론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한국의 성산업은 지하 속에서 남성들의 봉사를 위한 존재로 남고 있다.

이런 대한민국에서도 포르노그래피가 공공연히 대중 앞에 몸을 드러내던 시절이 있었다. 제5공화국의 3S 정책이 시작되자 80년대 한국 에로영화를 대표하는 <애마부인>을 시작으로 봇물처럼 쏟아진 에로영화는 다름아닌 대중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에로영화는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고 성의 대한 강박적인 거부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비디오가 안방에 자리잡으며 극장용 에로영화는 점차 사라졌다. 대신에 비디오 영화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다, 2000년대 들어서 비디오 시장의 몰락과 함께 에로영화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비록 불순한 정치적 동기에서 생겨난 짧은 해방 기간이었지만 우려한 것처럼 이 사회 도덕이 땅에 떨어져 성범죄가 만연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이런 시대적 허용이 계속 되었다면 우리의 인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성性은 더 이상 부끄러운 존재가 아닐지도 모르며 성性에 대한 고차원적인 담론이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포르노가 대중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포르노는 오명을 쓰고 지하로 숨어들고 만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성性에 대해 미숙했다. 아직 성性은 미지의 존재였고 두려움에 싸여 포르노를 탄압했다. 포르노를 자유롭게 허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성性의식은 낮을 수밖에 없다. OECD국가 중 성범죄율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성교육의 수준도 낮아 낙태율도 최고 수준이다. 이 나라에서는 도대체 콘돔 씌우는 법 하나를 제대로 못 가르치는 것인가. 성性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며 마약같은 인위적인 쾌락이 아니다. 만약 포르노가 사회에 해가 되는 존재였다면 성진국이라 불리며 세계 최대의 포르노 생산국인 미국과 일본은 고담과 소모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최근 건국대에서 열린 학술대회는 우리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음을 증명한다. 교수, 철학자, 의사에 심지어 목사까지 참여한 진지한 학술대회에서 논한 주제는 다름 아닌 포르노였다. 소위 지식인층의 이런 움직임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이제 우리도 성에 대해 주체적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포르노를 구속하고 있는 법을 폐지하고 지하에 숨어있는 성을 해방해야만 우리의 아름다운 성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