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춘은 대담한 납치행각과 잔인한 시체훼손, 그리고 인육을 목적으로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전국민의 경악과 공포,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 것은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사형 언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 사형 집행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기 마련이다. 사형을 집행하여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잃게 될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사형 집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흉악범죄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잠재적 흉악범들에게 사형이 그저 이름만 남은 것이 아니라, 실제 집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범죄 실행에 영향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사형수들의 수감기간 중 발생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도 흔히 사형 집행을 찬성하는 이들의 계산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정서적인 데 있다.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에 대한 복수이자, 흉악범죄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선량한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증오가 몰리는 그 원흉을 국가가 나서 해소해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과연 확실한가는 차치하더라도,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잃게 될 것에 비하면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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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게 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인권이다. 오원춘이 사람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여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데에 문제 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권을 보장받는다는 기본권의 울타리를 깨부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예가 있던 시절, 노예주는 노예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인이 노예를 때려죽인다 하여도 비난할 것이 없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스실에서 몰아넣어 죽이고 그 시체로 만든 기름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전세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동조자들을 북돋았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에 대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사실 인간 같지도 않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놈 하나 죽이는 것은 인류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생각으로 만약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사형시킨다면, 생명권에 대하여 우리와 노예주 그리고 히틀러의 태도는 원칙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국가에게 국민을 죽일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게 된 것은 정말 얼마 안 된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보장되는 불가침의 인권은, 원래 우리 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싸우고 죽고 투쟁한 뒤에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인권을 원칙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체는 없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역사는 사람은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역사보다 훨씬 더 길다. 그렇기에 사람은 모두 기본권을 갖는다는 이 ‘비교적 새로운’ 사실은, 미래를 위해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지금껏 있어왔던 ‘나쁜’ 제도들을 이에 맞추어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형제 폐지는 그 핵심 중 하나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것은 흉악범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권력, 인종, 장애, 성별, 외모, 재산, 학력에도 상관없이, 그저 사람으로 태어난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 대접 받을 자격이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