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죄를 저질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 생각해보면 죄와 벌이라는 개념, 모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곰이 사람을 죽였다고 치자. 그 곰에게 죄를 지었으니 벌을 줘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곰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오원춘 사건을 들여다보자. 일단, 화부터 난다.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했다. 그도 모자라 피해자 시신에서 때어낸 356개의 살점을 비닐에 보관해두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것 같지도 않다. 살인을 한 것 자체가 천인공노할 죄인데 시체를 훼손하고 용서를 빌지도 않는다. ‘저 놈은 사람이 아니다. 당장 사형해야 한다’라는 말,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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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원춘은 정말 사람이 아닌가. 생물학적으로 ‘그가 괴물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오원춘을 인식할 때, 사람들은 정말 그를 사람이 아닌 괴물로 인식하냐는 물음이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오원춘의 행동을 똑같이 저지를 수도 없겠지만 똑같이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들은 똑같은 분노를 느낄 것인가. 분노는 하되 그 분노의 결은 작금의 분노와는 결을 달리할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원춘이 우리가 아는 우리 곁의 ‘인간’임에도 그런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원춘은 분명 '사람'이다.

오원춘이 사람으로 밝혀진 상황, 이제 문제는 달라지겠다. 사형선고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원춘을 애써 괴물로 만들고 자신들의 분노를 풀길 원한다. 그러나 오원춘은 괴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인권을 갖는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죄자라도 어쩔 수 없다. 자연스레 구형되는 처벌도 인권의 범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오원춘에게 사형이 선고 될 수 없는 이유다.

왜 인권의 범위 안에서는 사형이 선고될 수 없는가. 인권 중 가장 높은 권리인 생명권이 침해받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형은 책임을 질 기회도 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질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책임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통용된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형은 책임질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그리고 생명권을 침해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권을 이중으로 침해하고 있다. 고로 오원춘에게 사형은 선고될 수 없다.

오원춘 사건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미는 사건이다.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처벌의 경중은 분노의 높낮이로 정해지지 않는다. 죄의 경중으로 정해질 따름이다. 분노가 치민다고 마구잡이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는 없다. 오원춘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오원춘이 받아야 할 벌은 인간의 벌이지 짐승의 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