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의무휴무 제도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SSM) 일요일 의무휴무 조례가 전국적으로 부침을 겪고 있다. 지난 6월 22일자 서울행정법원 판결 이후, 대형유통업체들이 지자체와의 힘겨루기를 법정으로 끌어다 놓았기 때문이다. 당초 서울행정법원이 의무휴무 조례에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은 절차상의 미비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취소 처분 자체를 부각해 보도하는 한편 “이 정도일 줄이야” <대형마트 매출 -7.2%비명(문화일보 7월 19일자)>, <대형마트 4대 악재에 ‘사면초가’(세계일보 7월 18일자)>, <믿었던 소비∙고용마저 주춤…하반기 ‘먹구름’(한국일보 7월 11일자)> 등 보도로 동정표 얻기에 부심하는 모양새다.

재계의 엄살은 예상된 반응이다. 의무휴무가 시행 첫 달 실제로 전통시장 및 골목상권에 유의미한 매출 성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동 제도의 추진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의무휴무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 훨씬 중요한 변수는 이 제도의 필요성과 의의를 소비자가 얼마나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비자의 입장 혹은 그 입장을 대변해 의무휴무 조례를 공박하는 주장의 근거는 대형마트가 소비자 편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과연 합리적인 이유에서 골목상권 대신 대형마트를 선택해 왔던 것일까? 


 
합리성으로 포장된 대형마트의 꼼수 
 
일반 가계 대상의 재무 컨설팅을 제공하는 ㈜에듀머니 제윤경 이사에 따르면, 대형마트는 할인과 포인트 적립을 미끼로 대량구매를 유도한다. 포인트는 어차피 같은 마트에서 다시 돈을 쓸 경우를 전제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영수증에 찍힌 포인트 적립액을 보며 그만큼 돈을 아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할인 프로모션으로 식료품을 대량 구매하게 되면서 물건을 실어 나를 자동차와 식료품을 저장할 냉장고의 크기가 해마다 커지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과거에 최종 소비지까지 상품을 운송하고 보관할 책임은 판매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교외에 위치한 대형마트까지 시간과 기름을 쓰며 찾아가, 식자재를 대량으로 보관해 놓고 꺼내 먹는다. 그러다보니 먹지 못해 버리기도 잦다. 
 
저명한 브랜딩 권위자 마틴 린드스트롬은 저서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대형마트에서의 소비가 사람들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대형마트는 의도적으로 상품의 진열 패턴을 자주 바꿔 사람들이 마트를 오래 돌아다니게끔 유도한다. 원하는 물건을 찾으러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은 쇼핑을 ‘사냥’이나 ‘수색’, 일종의 ‘게임’으로 인식하게 된다. 관련된 상품들을 지능적으로 배치해, 원래 계획에 없었던 물건을 집게 만들기도 한다. 
 
마트 자체 상표(PB상품)에 고/중/저가 라인을 따로 만들어 프리미엄 제품은 값이 비싸고, 저가 제품은 품질이 헐할 것이라는 판단에 소비를 은근히 가운데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요모조모 따져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그것은 마트가 사전에 깔아놓은 선택지 안에서의 합리성일 뿐이다. 


장시간 서서 일해야 하는 캐셔 노동자들.

 
나에겐 저렴한 서비스, 남에겐 저렴한 일자리
 
대형마트에서의 소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면 대형마트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마지막 편의란 아마도 시설의 쾌적함과 감정 서비스일 것이다. 마트는 청결해 보이게끔 관리되고, 냉난방 시설과 넓은 주차공간 및 기타 부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직원들은 소비자를 ‘고객님’이라 부르며 어떠한 요구에도 토 달지 않는다. 진열된 물건을 마음껏 만지작거려도 좋고 상점 주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도, 그의 텃세에 마음앓이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24시간 오픈, 깨끗하게 관리된 화장실, 각종 부가 할인과 서너가지 포인트 적립의 입력, 실컷 어지럽혀 놓아도 눈깜짝할 새 정돈되어 있는 진열장 -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쓸고 닦고 웃어주는 노동이라는 것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우리 자신이 습관적으로 소비자로서의 자아와 노동자로서의 자아를 분리하는 탓이다. 일자리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대형마트의 이 ‘좋은’ 서비스가, 대형마트의 주장처럼 ‘저렴’하기까지 하다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그것은 즉 ‘나쁜 일자리’를 뜻한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인 동시 노동자임을 인정한다면 내가 누리는 서비스와 누군가의 일자리의 질 사이에서 알맞은 균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대형마트 위주로 재편될 때 이 균형에 대한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얼굴 없는 자본인 대형마트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골목상권이 지닌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골목상권에 있는 하나 하나의 가게는 적어도 얼굴 있는 자본이기 때문이다. 


런던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은 인기 관광명소다.

 
대형마트를 선택하며 우리가 희생한 것
 
끊임없는 개혁을 요하는 골칫덩이로라도 중소 자영업, 즉 ‘골목상권’이 남아있는 한, 우리에게는 최소한 또 다른 선택지를 하나는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골목상권 차원에서 우리는 좋은 사장님, 좋은 가게 주인을 지원하고 나쁜 사장님, 나쁜 가게 주인을 보이콧할 수 있다. 그러나 대형마트가 마지막 하나의 골목상권마저 무너뜨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단 두 가지 선택으로 좁혀진다. 유통 대기업 본사 직원이라는 몇 없는 자리를 놓고 다투거나, 비정규직 캐셔가 되거나다. 그 유통 대기업이 월마트나 까르푸건 이마트나 롯데마트건 그들의 국적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의 골목상권을 박제 상태로 남겨두자는 주장이 아니다. 낙후하고 불친절한 가게는 당연히 골목상권에서도 퇴출 대상이다. 손님에게 무례하고 좋지 않은 물건을 떼다 파는 가게는 당연히 그보다 뛰어난 누군가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경쟁의 올바른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골목상권 전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운영 효율성을 감안한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자본의 운영 효율성만 생각한다면 중소자본이 존재할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골목상권에는 부침의 이야기,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 즉 역사가 있다. 그러나 자본에는 역사가 없다. 아무리 그 자리에 몇 년을 서 있었고 버스 정류장의 이정표가 된다고 해도 롯데에 사업부가 인수되는 순간 스스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남기지 못하고 그저 롯데마트가 될 뿐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일상의 풍경을 좌우하고 미래의 선택지를 삭제하게 놔둘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