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을 지켜봐주시는 여러분들, 설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세뱃돈은 많이 받으셨는지요. 저희가 회의 중에 다른 이야기를 좀 하다가 20대가 세뱃돈을 받기도 애매하고 주기도 애매한, 참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설날 특집으로 마련한, 남녀탐구생활 패러디 세뱃돈 편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시길^^




고향 다녀오기 힘드셨죠? ㅠㅠ
(이미지 출처 : http://news.nate.com/view/20080205n16300)



먼저 세뱃돈 주는 사람의 탐구생활이에요.

올해도 기어코 설날이 왔어요. 송년회의 카드 값 여파가 끝나기도 전에 조카들이 몰려와요. 누나들은 한국사회의 출산율에 기여라도 할 모양인지 애들을 셋씩이나 낳았어요. 남자의 등골이 벌써부터 오싹해요. 그래도 은행으로 가서 새 지폐를 바꾸기로 해요. 남자는 좋은 삼촌이니까요. 대신 저번에 누나한테 빌렸던 돈을 이걸로 퉁 치기로 해요.

집에 오니 벌써 조카들이 와서 하이에나 같은 눈으로 남자를 반겨요. 벌써부터 세뱃돈을 받으면 뭘 할 지 의논해요. “요즘 삼촌 돈 좀 번다며?” 라며 어린 녀석이 남자를 간보기도 해요. 부담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해요. 앗.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매번 설날에는 특강을 듣는다고 못 왔던 수험생 둘이 올해에는 등장했어요. 제길. 남자는 화장실로 가서 뽑아온 돈을 다시 계산해요. 아무래도 배춧잎 두 장이 모자라요. 남자는 누나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해요. “누나 돈 좀만 빌려줘.” “돈 없어! 네가 알아서 해!” 누나는 마귀할멈 같은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해요. 애들 돈이 곧 자기 돈이라며 절대 줄 수 없대요.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조카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 피운다며 집을 나서요. 통장에는 딱 2만원이 남아있어요. 출금 버튼을 누르자 잔액이 부족하다고 해요. 아뿔싸. 설날은 공휴일이라 ATM 수수료도 붙는대요. 남자는 만원만 뽑아서 은행을 나서요. 막내는 아직 중학생이니까 만원만 주기로 해요.

집에 들어가기 무섭게 누나가 세배 타임을 시작해요. 이미 조카들은 일렬종대로 맞춰 서서 어른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엄마 아빠부터 세배를 받기 시작해요. 손자, 손녀들이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엄마는 세뱃돈 봉투를 나눠줘요. 조카들의 입이 찢어지기 시작해요.

누나 내외들도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요. 둘째 매형이 요즘 돈벌이가 좋다더니 갑자기 지갑을 통째로 꺼내 초록종이를 세기 시작해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장이나 집어서 한 명씩 나눠줘요.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조카에게는 하얀 종이도 끼어 있어요. 지폐 두 장씩 주는 걸 자랑하려고 지갑에 넣어두었던 남자의 돈이 조금 부끄러워지기 시작해요.

남자는 부랴부랴 흰 우편봉투를 찾아요. 금액을 감춰야 해요. 남자의 차례가 왔어요. 누나들이 눈치 없이 소리쳐요. 야. 너 취직도 했겠다. 돈 좀 많이 뽑아 왔겠지? 둘째 대학가는 거 알지? 갑자기 남자의 등줄기 따라 식은땀이 스윽 흘러요. 조카들이 세배를 하겠다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날을 그토록 기다려왔는데 작년부터 설날은 남자의 용돈 절대 부족 원인이에요. 2월에는 아무 것도 못해요. 오만가지 감정이 지나가는데 세배가 끝났다며 조카들이 손을 내밀어요. 남자는 흰 봉투 한 장씩을 나눠줘요.

올해도 무사히 끝났다며 일어서는데 막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해요. 삼촌한테 만원만 더 받으면 10만원 채우는 건데 하면서 울먹이더니 오빠들보다 자신만 만원 덜 준다며 엉엉 울기 시작해요. ‘계집애야 넌 중학생이고 오빠들은 고등학생이잖아!!!!!!!!!!!’ 라고 소리치려는데 막내누나가 남자를 불러요. “그냥 만원 더 줘라. 애 우는데.”

제길. 남자는 집에 갈 때 편히 KTX 타고 가려던 돈을 꺼내요. 오천 원짜리에 천 원짜리 지폐가 섞여 있어요. 그제야 조카가 교정기를 단 치아를 활짝 내놓고 방긋 웃기 시작해요. 그래도 마음은 좀 뿌듯해져요. 오늘은 집에 갈 때 고속버스를 이용해야겠어요. TV에서는 귀경길 대란이 시작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세뱃돈 주는 사람의 탐구생활이었어요.



세뱃돈은 많이 받으셨나요? 혹은 이만큼이나 조카들한테 주셨나요?
(이미지 출처 : http://minihp.cyworld.com/pims/main/pims_main.asp?tid=56979477&urlstr=phot&item_seq=410658575&board_no=83&urlstrsub=search&seq=83)


이번엔 세뱃돈 받는 사람의 탐구생활이에요.

드디어 여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설이 돌아왔어요. 여자가 설을 기다린 이유는? 고향의 푸근함? 아니에요. 맛있는 음식들? 틀렸어요. 보고 싶은 친척들? 개뿔이에요. 만나봐야 남의 편입 걱정, 취직 걱정, 결혼 걱정, 몸매 걱정, 외모 걱정이나 하는 오지랖 친척들 필요 없어요. 여자가 설을 기다린 이유는 바로 세뱃돈을 받기 위해서 에요.

그동안 방학이라고 학교 밖으로 나돌다 보니 출혈이 심했어요. 지금 당장 고향 내려갈 돈도 친구한테 빌려서 간신히 마련했어요. 고향으로 가는 버스가 더 이상 잠도 안 올만큼 막히고 있어요. 여자는 올해 세뱃돈은 얼마나 얻을지 예상해 보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래도 작년보단 경기가 풀렸으니 세뱃돈도 지난 번 보다는 풍년일 게 틀림없어요.

여자는 머릿속으로 세뱃돈에 휩싸인 자신의 고결한 모습을 상상해요. 먼저 친구한테 빌린 돈 3만원을 갚아야 해요. 친구 사이에 돈 거래는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고향엔 가야하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 친구는 내 몇 없는 베스트 프렌드니까 돈을 빨리 돌려주어야 해요.

그 다음엔 말할 것도 없어요. 여자는 1년 동안 쌓아놓은 자신의 위시리스트를 이미 다 가지고 있어요. 새 옷, 새 가방, 새 화장품, 새 악세사리 등. 쉬크하면서도 엣지 있는 간지작렬샤방샤방 스타일로 구입할 생각이에요. 아 그런데 세뱃돈만 가지고는 이 모든 것들을 사기는 힘들 것 같아요. 엄마카드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등록금을 떠올리며 안되겠다 싶어 위시리스트의 우선순위를 열심히 정해요. 정말 이런 시간은 여자에게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에요.

여자가 행복한 상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버스가 고향에 도착했어요. 고향집에 가니 오지랖 친척들이 보여요. 코를 성형해보지 그러니, 토익 점수는 얼마나 나오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는 건 어떠니 아주 오지랖 친척들이 다 모였어요. 여자는 적당히 억지웃음을 짓다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해요. 내일 아침엔 아마도 이런저런 충고를 들어도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에요. 세뱃돈이 있으니까요.

드디어 설날 아침이 되었어요. 잔뜩 부푼 마음으로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려요. 봉투를 작년과 똑같이 5개나 받았어요. 작년엔 꽤나 두툼했던 봉투가 올해는 얇아졌어요. 5만원권이 나오기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 작은아버지 사업이 대박을 쳤다는데 수표가 있는 건 아닐까 기대가 되기도 해요.

사실 여자도 세뱃돈 받는 마음이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어릴 때는 스무 살이 넘으면 세뱃돈을 당연히 안 받는 건 줄 알았는데,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세뱃돈을 받고 있어요. 게다가 몇 살 위인 사촌 오빠, 언니들은 이제는 취직했다며 어려운 사정에 세뱃돈을 안 받고 조카들한테 주기도 해요. 하지만 애매하지만 아무래도 돈은 들어오는 게 낫겠다 싶어 올해도 감사하게 받았어요.

감사와 반성까지 이제 봉투를 열 준비를 모두 마쳤어요. 헐. 이런 우라질 브라질 말미잘레이션. 봉투 5개에 똑같이 5천원권 한 장씩만 들어있어요. 유치원생 조카 봉투랑 바뀐 건 아닌가 싶어 다시 쳐다봐요. 5천원이에요. 저기 그려진 사람이 이황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아닌가 싶어 다시 쳐다봐요. 5천원이에요. 새 돈이 워낙 빳빳해서 여러 장인데 한 장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쳐다봐요. 한 장이에요. 똥망개망시망이에요.

올해부터는 친척들이 세뱃돈은 액수보다 정을 더 중요시하기로 했대요. 이걸 어떻게 해요. 여자의 환상은 한꺼번에 무너져요. 왕복 버스비도 안 나왔어요. 여자는 최대한 투덜거리는 표정을 감추며 또 다시 잠을 잔다며 방으로 들어가요. 지금까지 세뱃돈 받는 사람의 탐구생활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