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럼’을 통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마약, 폭력, 범죄, 비위생적, 암흑, 쓰레기, 가난 등과 같은 부정적 느낌의 것들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슬럼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 과정은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슬럼의 철저한 미국식 해석에 노출된 과정이기 때문에 슬럼에 대한 편견은 더욱 심각하다. 소위 ‘흑인 갱’들이 가득한 위험한 지역,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지역으로만 묘사되어 온 슬럼, 하지만 실제의 슬럼은 평범한, ‘동네’이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의 책을 참조하면, 저개발국가 도시인구의 78.2%가 슬럼 거주자일 정도로 슬럼은 일상적인 곳이다.



▲ 출처 : http://blog.naver.com/wert5425?Redirect=Log&logNo=8120859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슬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시의 빈민굴, 도시사회에서의 지역 병리현상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빈민이 많은 지구나 주택환경이 나쁜 지구를 말한다.” 여기서 지역 병리현상은 해당 지역, 즉 슬럼 내부에서부터 생겨난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과밀화에 따라 발생한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슬럼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일시적이거나 지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슬럼화가 거대한 세계화의 조류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세계화의 치부이기 때문이다.

세계 도시 인구 순위와 GDP 순위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도시의 성장이 경제적 성장에 의해 유발된 결과가 아님을 증명한다. 오히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등에서는 ‘성장 없는 도시화’가 보편적인 것이 현실이다. 농민들은 왜 ‘부(富)’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바로 세계화의 과정에서 그 피해자가 되어 농민으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주도한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 즉 농업 자유화 정책이나 금융 감독 정책 등으로 인해 제3세계의 농민은 시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 출처 : http://cafe.naver.com/pcuspe/88622


농촌에서 밀려났지만, 도시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파국적인 상황. 이것이 빚어낸 도시의 과밀화, 과잉 도시화로 인해 슬럼이 도시의 이주민들을 짓밟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가우탐 차터(Gautam Chatterjee)는 이러한 과잉 도시화가 계속될 경우 ‘도시는 사라지고 슬럼만 남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약소국의 정부는 이러한 슬럼 거주민들을 구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들의 운명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주택시장의 민영화나 정부주도 프로그램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 강령을 주장하는 IMF, 세계은행 등의 거대 국제기구이다.

국제기구들은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화를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빈민들을 더욱 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슬럼화의 반사 이익을 통해 부를 얻는 현지인들이 있는데, 바로 부동산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지주들과 개발업자, 즉 자본의 소유자들이다. 과잉 도시화로 인해 주거 공간에 대한 수요가 극단적으로 상승하게 되어 도시 주민들이 가난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집세는 엄청난 폭등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 슬럼 문제를 조명한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 본 기사의 많은 부분을 이 책에서 참조하였다.


이러한 슬럼의 현실을 알게 되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반응은 ‘불쌍하다’는 표현이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참 다행이다’는 식의 자기 위안이다. 하지만 슬럼은 결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슬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슬럼과 비교해 조금 민망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도시들에도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된 지역은 얼마든지 많다. 한국의 빈민가 비율이 37%에나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주택시장의 자유화가 계속되고, ‘가진 자’의 이익에 충실한 부동산, 조세 정책이 관철된다면 우리나라 도시의 주택 문제도 더욱 심각해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드라마 <검사 프린세스>에 등장했던 재개발과 관련된 갈등, 혹은 철거민들의 눈물은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의 가장 큰 사회 이슈 중의 하나였던 용산 참사는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 ‘좀 더 도시적이고, 좀 더 화려한 공간’, 많은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위한 공간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뉴타운’ 건설은 사실은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건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종합부동산세의 삭감 역시 이러한 정책의 경향성을 잘 드러낸다.



▲ 출처 : http://cafe.naver.com/scrapfile/486


반면, 종합부동산세 등 직접세가 줄어드는 만큼, 물건에 붙는 세금이나 공공설비 이용요금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악화되는 것은 못 가진 도시 서민들의 삶의 질이다. 이러한 도시 서민들 중 다수는 20대, 즉 우리들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울 등의 도시로 편입해야 하고 딱히 거주 기반이 없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20대의 삶을 시작한다.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졸업한 후 직장이 있는 20대 후반이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반지하, 창문 없는 방, 세면대 없는 욕실, 혹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욕실, 방음도 안 되어 옆방의 문을 매일 같이 두드리며 얼굴을 붉히는 생활. 글쎄. 이런 상황이 조금만 악화될 경우 우리가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의 심각한 환경인 슬럼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우리들 사이에 펼쳐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상상이기만 할까? ‘빈익빈 부익부’의 논리가 지배하여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 속에서 주거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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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의 비극에서 보았듯이, 국가가 빈민가나 철거민들을 대하는 것은 동등한 위치의 협상 대상 혹은 함께 살아가야 할 시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들이 살아갈 길에 대해서 국가는 고려하지 않으며, 그저 그들은 ‘쓰레기’ 다루듯 다루어진다. 슬럼의 문제에 대해 내 일이 아니라며 눈을 감거나 불쌍한 제3세계를 위해 성금을 내는 수준의 대응만 하다가는 어느새 우리 자신도 ‘쓰레기’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도시를 슬럼화시키고 있는 세계화의 메커니즘과 어두운 면에 주목하고,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함께 풀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