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부터 언론이 대학을 평가하고 있다. 언론사 대학평가가 수험생, 학부모에게 영향을 주면서 대학도 언론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앙일보가 대학평가로 꽤나 재미를 보자 다른 신문사도 줄지어 대학평가에 뛰어들었다. 고함20도 염치없이 이 축제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자 한다.

다만 논문인용지수, 평판, 재정상황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방법을 거부한다. 조금 더 주관적이지만 더 학생친화적인 방법으로 대학을 평가하려 한다. 강의실에선 우리가 평가받는 입장이지만 이젠 우리가 A부터 F학점으로 대학을 평가할 계획이다. 비록 고함20에게 A학점을 받는다고 해도 학보사가 대서특필 한다든가 F학점을 받는다고 해도 ‘훌리건’이 평가항목에 이의를 제기하는 촌극은 없겠지만, 고함20의 대학평가가 많은 사람에게 하나의 일침이 되길 기대한다.

열 번째는 대학 영어강의제도다. ‘세계화’ ‘글로벌’이라는 단어는 이제 사방팔방에 포진해있다. 대학들은 너도나도 ‘글로벌한’ 학과를 만들거나, 앞다투어 신생 커리큘럼을 짜내거나, 여하간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경쟁력을 갖추겠다며 분투 중이다. 2006년 한국 대학교육협의회에서 매년 내놓는 대학평가 평가항목에 ‘영어수업 비중’이 포함된 직후부터 가열된 경쟁이다.

이제는 필수 코스로 여겨지는 영어강의는 대학마다 비슷한 듯 다르다. 새로 임명된 교수에게는 첫 3년 간 의무적으로 영어강의를 개설하도록 하는 곳도 있고, 학생도 일정 학기 동안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제도를 바꾼 곳도 수두룩하다. 현실에서는 학생들이 A로 시작되어 F로 끝나는 알파벳순 성적 시스템 때문에 충분히 골치 아팠을 테니, 이번 <고함20 대학평가>에서는 특별히 P/F로 각 대학의 영어강의제도를 평가해 봤다. 

서울여대 학보 9월 2일자 기사. 영어강의 비중의 증가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FAIL : 한국과학기술원(KAIST) / PASS : 광주과학기술원(GIST) 

연구중심 이공계대학인 카이스트, 울산과학기술대, 포항공대 등은 전공과목을 일부 또는 전부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용어는 대부분 영어로 되어있다는 것이 큰 이유다. 2011년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 사태가 발생하자, 카이스트가 전국 대학 중 영어강의 비중 1위였다는 사실이 발표되며 논란이 가열된 바 있다. 논란이 거세지자 카이스트 측은 영어강의의 비중을 기존의 90% 수준에서 매 해 조금씩 줄이고 있다. 

그런데 융통성 없이 진행되는 영어강의에 시달리는 학생은 여전히 많아 보인다. 경시대회 수상자 및 학교장 추천자 등 다양한 전형을 두고 있기에 입학 당시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입학 전 영어시험을 봐서 통과하지 못하면 영어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이 또한 학점에 포함되기 때문에 ‘실력 향상을 위한 도움’이라기보다는 ‘성적 이수’로만 느껴지기 일쑤다. 이런 처지니, 수업을 들을수록 학생 간 실력의 편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카이스트신문 기사에 따르면, 총학생회에서 재학생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공과목의 영어강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50%, 영어 강의가 본인의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의견은 52%로 영어 강의의 효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학교에서는 절대평가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상대평가다. 교수님들이 학교 측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점 비율을 어느 정도 정해놓는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재학생 남영식(22)씨의 말이다. 평가기준 문제와 더불어, 카이스트에는 영어수업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대책이 미비하다. 영어강의의 비합리성에 대한 학생들의 호소는 안타깝게도 아직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만 20년 동안 대학원만 존재했던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2010년부터 학부 강의를 도입하면서 영어강의를 개설했다. 현재 수학, 과학 및 전공과목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며 과제 및 시험 답안, 논문까지 영어로 작성해야 한다. 단, 실험과목에 있어서 한국인 조교가 지도할 경우 한국어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의사소통상의 문제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영어 강의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신입생을 대상으로 입학 전 한 달간 영어캠프를 실시하고 정규 수업 이외에 원어민 강사와 무료 1:1 영어 스피치클리닉을 개설해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외에도 졸업준비생이나 교환학생 프로그램 준비생들을 위해 English Workshop을 개설해 자기소개서나 면접에 도움을 주고, 학교 도서관 웹사이트에 어학 강좌를 개설하기도 한다고. 영어 학습에 공들이는 대학답게 실로 ‘빵빵한’ 학습지원이다.

지스트대학 총학생회장 박원우(22)씨는 “1, 2학년은 당연히 영어 강의가 익숙지 않고 힘들어서 강의만은 한국어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질수록 영어 강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외국인 교수님의 강의를 선호하기도 한다. 학생들 모두 과학 분야에서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3, 4학년이 되면 만족도가 60% 정도에서 90%로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스트대학에서 이러한  교육이 가능한 환경적인 이유는 입학생 정원이 100명이기 때문이다. 교수 대 학생 비율이 1:7로, 소수 정예로 운영되기 때문에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임에도 교수로부터 학업에 도움을 받기에 유리하다. 이러한 환경이 타 대학에서도 조성되기란 쉽지 않기에,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지스트에 PASS를 선사한다.

PASS : 성균관대 경영학과, 글로벌경영학과 / FAIL: 서강대 경영학과

성균관대는 글로벌 경영, 글로벌 경제, 글로벌 리더로 이어지는 이른바 ‘글로벌 3총사’ 학과를 개설한 바 있다. 이 중에서 모든 수업이 국제어로 진행되며 그 중 90%가 영어인, 어마어마한 영어공부를 요구하는 글로벌경영학과에선 아예 별도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물론 고난이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만, 경영학을 영어로 공부하는 데에 자신 있다면 애초에 지원을 이쪽으로 하면 된다. 

성균관대 경영대학 행정실 유은경 씨는 “조금씩 변동은 있지만 경영학과의 경우 평균적으로 매 학기 30% 정도의 수업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국제어로 열리고 있다. 이 30%도 학생들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졸업 전까지 전공 수업에서 9학점만 들으면 졸업 가능하다.”고 말했다. 글로벌경영학과에는 추가적인 교육과정이 도입되어 ‘명품’ 학과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반 경영대 학생들이 영어 때문에 부담을 가질 일은 없다.

같은 경영학과라지만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는 최근 영어강의의 절대평가 문제 때문에 홍역을 앓았다. 상당수의 대학이 영어 강의의 난이도가 한국어 강의보다 높다는 이유로 절대 평가제를 시행하고 있으나, 서강대는 보란 듯이 이 추세에 역행한 것이다. 지난 10월 29일 진행된 ‘총장과의 대화’에서 경영학과 학장은 “국제 수준에 맞는 교육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취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총학생회를 비롯한 경영학과 학생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서강대 경영학과 학생들이 영어강의 상대평가제 유지에 반발하는 까닭은 전체 학부 중 경영대학과 영미문화계(영미어문, 미국문화)에만 그러한 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직접적으로 영어와 관련이 있지 않은데도 영어수업을 전체 강의의 절반 가까이 개설하며 상대평가까지 유지하겠다니, 당연히 FAIL 도장을 찍어줄 수밖에 없겠다.

인천대학교 English Reading & Listening수업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저작권: 이말년)



FAIL of FAIL : 인천대학교 English Reading & Listening

피날레를 장식할 fail의 영광은 인천대학교에게 돌아갔다. 인천대 학생들이 무려 4학기 동안 이수해야 하는 필수강의 English Reading & Listening(이하 잉리리)는 ‘개판’으로 악명이 높다. 우선 이 수업은 엄연히 영어 ‘강의’ 수업으로 분류되고 교수가 배정되나 사실상 수업다운 수업은 3시간 중 1시간뿐이다. 그나마 그 1시간도 올해부터 정식 교재가 생겨 확보된 시간이다. 그 전까지는 강의실 뒤쪽 서가에 꽂힌 책들 중 학생이 임의로 하나를 골라서 읽고 컴퓨터 프로그램(SRI, Scholastic Reading Inventory, 영어독서능력평가 시험으로 독서수준을 평가한다)으로 시험을 보는 행위의 반복이었다. 

학생들의 증언은 생생하다. “영어 잘 못 하는데 다짜고짜 혼자서 책 읽으라고 해서 많이 힘들었다.” 최민영(23) 학생의 말이다. 원무창(21)씨는 “그거 진짜 별론데 필수다. 프로그램으로 시험볼 때는 아무도 안 감독하니 커닝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 수업의 문제점은 자신의 실력에 대해 정보도, 확신도 없는 학생들더러 무턱대고 원서를 꺼내와 ‘혼자’ 읽고 요약하고 시험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엄연한 학교의 교과과정이면서 실력 향상을 위한 도움은 조금도 주고 있지 않은, 간판만 ‘English'로 달아놓은 황당한 꼴이다.

이러한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작년 인천대 총학생회에서는 ‘잉리리 개선 프로젝트’를 운영하기도 했다. 재학생 3,31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자가 72.6%, ‘영어능력 향상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70.4%에 달했다. ’잉리리‘의 최소 P/F방식 전환, 최대 완전 폐지가 목표였던이 프로젝트는 결국 총학생회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실패로 끝났지만, 이 강의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밝혀내는 데에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어강의는 영어가 필요한 과목에 한해 실시될 때, 그리고 영어로 강의를 할 능력이 되는 교원에게 맡겨질 때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 학과 및 수업의 구분 없이 영어를 강요하면서 수업 이외에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한 뒷받침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어 강의의 효과는 보장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각 대학마다 상이한 교과과정을 보이지만 PASS를 받을 만한 곳은 찾기 힘들었던 까닭은 바로 이 ‘불도저식 강제’에 있다. 영어 지옥에서 끙끙대는 학생들을 외면하는 대학들, 분발하라. 그만큼 영어, 그 두 글자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FAIL을 받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