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 이야기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로 뛰어 내렸다. 당일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 급보를 듣고 비상대책회의가 열렸고, 민주당은 상주로 당사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시민들은 자비를 모아 광장 곳곳에 분향소와 추모 집회를 열었다. 7월 10일 故 노무현 대통령의 49재가 열렸다. 필자는 행사 진행 요원으로 봉하마을에 갔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석(대통령 노무현)


당시 봉하마을엔 노오란 풍선이 잔뜩 줄을 이어 있었다. 추모 문구와 현수막이 가득했다. 봉하마을엔 1차선 도로가 있다. 마을이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차로였다. 1차선 도로에 옐로우 라인을 설치했다. 한쪽 도로에는 사람이 다니고 한쪽 도로에는 운구차가 오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운구차가 지나는 도로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도록 스텝들이 제지했다. 옐로우 라인이 완성되자 추모객들은 인도로 지정된 도로로만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운구차 도로에서 얼쩡이는 사람이 있었다. 진행요원으로서 그 사람을 쫓아내고자 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백발 섞인 머리는 몇 달을 감지 않은 듯 했다. 그 수상한 행인(?)은 운구차 도로를 지나가며 머리를 땅에 박고 절을 했다. 돈을 구걸하는 걸인과 같이 보였다. 행사 진행과 추모객들에 피해가 될 거 같아서 쫓아내고자 했다. 그를 끌어내고자 다가갔다.

나는 다가가 행사 진행을 방해하는 초라한 행인을 보고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는 돈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구차가 지나는 도로의 돌과 유리를 솎아 내고 있었다. 그는 벗은 발로 도로를 지나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바지런히 맨몸으로 길을 닦고 있던 것이다. 슬픔을 꾹 눌러 참은 듯 눈엔 눈물이 어른 거렸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자기의 몸을 바쳐 닦고 있던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길을 닦고 있었다. 무릎을 연하고 한 톨 한 톨 돌을 솎아 내었다. 

불교의 종파인 소승 불교는 고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고자 수양한다. 가부좌를 틀고 불길을 지나는 고행과 뾰족한 침이 놓인 길을 걷는 일 등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며 도에 이르고자 설법한다. 봉하마을에서 온 몸으로 길을 닦던 그도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맞이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긴 화두는 개혁이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지역 갈등을 일소하고 고비용, 저효율의 정당,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자 했던 노무현.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으로 개혁 진보 세력이 등으로 지지 세력이 이탈 했다. 하지만 진보 개혁 세력은 그를 기억한다. 

화엄 사상에 전체는 하나로 하나는 전체라는 말이 있다. 봉하마을에서 온 몸으로 길을 닦고 있던 행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노무현이 왜 부엉이 바위를 뛰어내렸는 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행인은 몸으로 노무현의 화두를 말하고 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 동등히 존경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해 누군가의 길을 만드는 것은 자기를 낮춰 그 뜻과 정신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노무현은 정치에 회의를 느낀 국민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았고 개혁의 필두에 섰다. 열린우리당 해체, 4대 개혁의 실패 등으로 미완의 개혁이었지만 그가 남긴 화두는 우리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 있다. 곧 우리가 노무현의 개혁을 기억하는 마음이 개혁의 또 다른 씨앗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곧 화엄이다.

진보의 가치는 정의(正義)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 했고 한국의 진보주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더 낮은 사람을 위해 노력 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2002년 대선 시민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모아 돼지 저금통을 만들었고, 2010년 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귄위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되었다. 2010년 10월 현재, 아직도 봉하마을을 발길은 끊이질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