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살아 남은 자의 슬픔 //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위에 참가한 프랑스 고교생들.


 연금법 개정으로 프랑스가 떠들썩하다. 프랑스 국공립 고등학교 1000여 곳은 동맹 휴학에 들어갔고, 대다수 학부모는 자녀의 휴학을 지지했다.  관공서를 제외한 슈퍼마켓, 버스 등 파업으로 영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공항 운행은 불규칙이고 철도는 거의 마비 상태다. 그럼에도 프랑스 국민 70%정도가 파업에 찬성한다.

 여론이 조금 수그러들긴 했으나 아직 저항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노동자, 학생이 연대해 투쟁 전선을 이루고 있다. 투쟁의 전위대는 고등학생이다.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 깃발을 들었다.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다.


 프랑스 학생 vs 대한민국 학생

"토익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던져라." 88만원 세대의 담론이다. 연대하여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대학생은 세상이 두 쪽이 난들 열심히 공부만 한다. 운동권은 대학가에서 소외된 지 이미 오래이다. 대학의 등록금 인상에도 대다수의 대학생은 침묵한다. 일반화 할 수 없지만 대다수 한국 대학생의 패러다임은 "열심히 공부해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어, 최고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두가 경쟁 상대이다. 나이, 학력,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적이다. 여기에 인권과 사회 정의를 말하며 연대하자는 것은 소위 '빨갱이짓'으로 내보일 뿐이다. 보수 담론 세력 보다 더 깊이 대학생들은 보수적이다.

 연금법 개정이 통과되자, 프랑스 학생은 궐기 했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우리 보고 더 많이 일하고, 더 일찍 뒤지라는 말이냐"하며 바리게이트를 치고 깃발을 들었다. 한국 대학생은 MB정부가 연금을 수백억 원을 펀드 투자로 날려 먹어도, 정부가 대학생 지원금을 삭감해도, 반값 등록금이 유명무실화 되도, 정규직 일자리가 거덜 나도 침묵한다.

 최근 이웃을 신뢰 하냐는 질문에 국민 10명 중 3명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G20' 국가의 평균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한국 대학생은 사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내가 성공하는 것과는 관계없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이다.




볼에는 '개정에 반대한다'고 쓴 여학생



냉소주의의 한국 사회 그리고 대학생

 등록금 인하 서명도, 용산4구역에 대한 정부 시책의 항의에도, 미디어법 파동에 대한 반발도 대학생들에겐 냉소적이다. 설사 시위를 하고 서명을 한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거란 냉소가 팽배하다. 누구도 이 사회에 정의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삼성 일가는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는다. 미국이라면 불법 승계와 책임을 물어 징역 200년 형이 선고되겠지만, 한국에선 보란 듯이  경영권을 되찾는 그들을 보며 세상은 그런 것이라 수긍한다. 여기자의 가슴을 주무르며 성취행한 국회의원은 떳떳하게 국회에 재입성 했다. 장관의 딸이면 시험 없이 면접만 보면 공무원이 된다. 국민은 군역을 빼먹는 건 지도층의 당연한 책무라고 조소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얼굴이 시큰한 일이다.

 정의를 말하면 왕따가 된다. 모두가 예할 때 아니오! 하는 것은 객기요, 철모른 어린 아이의 발악이라 여겨진다. 남성은 군대에서 폭력을 내면화 한다. 설사 그것이 옳지 않은지 알면서도 이미 도덕성은 아웃 오브 안중이다. 이 사회의 정의는 오직 힘과 권력이다. 20대가 보수화를 내면화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역사를 지켜보며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교훈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런 악랄한 부정의를 타개하고자 사람들은 투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화해서 어떻게든 강해지고, 많이 가지려 한다. 이명박 신드롬, 정주영의 성공 일담에서 볼 수 있듯이 설사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어도 '성공만 하면 억울한 것을 보상 받는다.'는 믿음이 곧 신화이다. 사회를 바꾸려 하기보다, 사회의 먹이사슬의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직업의 귀천은 명확하다. 그래서 더욱 발악한다. 가족과 믿을 수 있는 구릅이 똘똘 뭉쳐 패거리를 이루고 계급 상승을 도모 한다. 반칙과 변칙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성공해야 한다. 뒤틀린 방법일지라도 성공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설사 커닝이든 표절이든 중요하지 않다, 좋은 학점을 안전하게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죄책감 없이 해피캠퍼스를 찾아 다운 받아 제출하는 대학생도 적지 않다. 오히려 이런 학생을 비판하는 것이 더 손가락질 당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



 대학생은 당면한 일자리 문제를 사회 연대를 통한 해법을 모색하지 않는다. 토익과 스펙을 채우는 것이 일자리를 구하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대학생은 양질의 일자리가 줄고 청년 실업이 장기화 돼도 저항하지 않는다, 어찌 됐던 나만 성공하면 되니까. 무엇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이웃과 친구를 믿는 것이 바보라고 비난 받는다.


 역사는 당신으로부터


 군사독재 시절, 대다수의 대학생이 거리로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오늘날 강단에 앉은 교수들의 다수는 교실에 앉아 양심에 침묵했던 이들이다. 그들을 뭐라고 할 수 없다. 사회 운동만이 정의는 아니다. 하지만 철저히 시류를 도외시하고 자기 안락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기득권을 점유한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이다. 20대는 대학생은 이런 세대의 시류를 보며 철저히 잘 사는 방법을 학습한다. 

 건설업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언제나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였다. 처벌 받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사기도 치고, 나라가 무너지건 상관없이 적당히 땅 투기도 하고, 적당히 뒷돈도 챙기면서 말이다. 언제나 자식에게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 이 시대의 아버지였고, 그것이 시대의 교훈이었다.  


선거 유세하는 청년 김대중


  냉소주의는 "뭘 해도 안 되니까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라"라는 의미지만, 근본적으로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미래를 바라기 때문에 현실에 실망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굵직한 역사의 발아는 20대에서 시작됐다. 23살 청년 김대중은 부패한 정치를 갈아 치우고자 정계에 나섰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국민회의를 조직할 때도 20대 때였다. 모든 역사는 불가능에 대한 저항이다. 냉소주의가 팽배한 한국에서 불신을 거둘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 다만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갈 뿐이다. 냉소주의는 불신을 조장하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을 바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대는 20대가 나아갈 모습을 논의한 적이 없다. 모여야 할 때다. 제도권, 비제도권을 아울러 정치의 일선에서 모여야 한다. 연대의 시작은 바로 당신에게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