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인구 1/3이 학살 됐다. 정부의 군부 세력에 자행된 무차별 학살로 200만 명이 총칼에 스러졌다. 1975년에서 1979년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인류 역사에 유래 없는 대학살이었다. 셀로스 사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명분 없는 셀로스 사르는 국민적 저항을 총칼로 도륙한다. 바로 킬링필드다. 이런 킬링필드가 사실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자행되려 했다.

킬링 필드에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는 탑(출처 위키백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사건의 발단은 부마항쟁이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총재에 김영삼이 당선 되자 공화당(여당)은 김영삼 총재에 반정부죄목을 뒤집어 씌어 제명을 결의 한다. 김영삼 총재의 재명 파동으로 야당은 총사퇴 했다. 양심 있는 지식인은 궐기 했고 대학생은 거리를 메웠다. 부산대학교 학생과 동아대학교 학생이 주축이 거리를 메웠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합세해 격렬히 투쟁했다. 시위의 불길은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파견한다. 경찰력으로 진압이 불가할 것이란 보고를 받는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선 300만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죽이는 것이 대수겠습니까”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부추긴다. 정부는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박정희는 계엄군에게 발포 명령을 허락한다. 차지철 주도의 부산의 대학살의 조짐이 드러났다.

탕탕! 총탄에 스러지는 것은 국민이 아니었다. 유신 통치의 철옹성 박정희의 심장에 총탄이 관통했다.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박정희가 텃밭 부산에 총구를 겨눈 이유

 

박정희는 지역주의를 적극 조장한다. 영남과 호남을 갈라 영남에 물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호남을 소외시킨다. 지금도 영남에서 공화당의 계류인 한나라당은 몰표를 받는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다큐맨터리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中



 자신을 열렬히 지지하는 부산에 박정희가 총구를 겨눈 이유는, 더 이상 부산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유신 선포 이후로 영구 집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애초에 박정희는 국회의원을 경멸했다. 의회 폐지도 발언도 서슴지 않고 했다. 총선에서 져도 유신체제에선 아쉬울 것이 없었다. 더 이상 대선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박정희는 자신을 지지하는 영남을 버린다. 박정희의 이런 정략적인 계산으로 부산에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있던 것이다. 부산시민들은 “설마 발포하겠어.”했지만 실제로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다큐맨터리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中



 박정희는 영남을 위해 영남의 발전을 도운 것이 아니다. 정략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영남을 전초기지로 삼은 것이다. 유신선포 후 보여준 행태는 필요에 의하면 권력은 언제든지 뭐든 버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권위주의는 종식됐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역사적 비극의 잔재인 지역주의는 깨지지 않았다.

 

다큐맨터리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中


 

학살의 잔상은 광주로 이어진다.

 
 박정희와 같이 권력을 찬탈해 권자의 앉은 전두환 역시 정당성이 없었다. 악당의 최후의 도피처는 애국이란 말이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전두환은 ‘조국 수호’와 안보를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
 독재자는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짓밟아야 했다. 전두환 권력의 총부리를 광주로 옮긴 것이다. 광주에서 무차별 사격과 몽둥이질이 이루어졌다. 시민은 군대를 조직했고 정부에 저항했다. 1979년 부산에서 일어날 뻔한 참혹한 비극이 광주에서 자행된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 우리는 뼈 아픈 비극적인 역사의 산증인이다. 러시아의 윤동주, 네크라소프는 말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이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슬픈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