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정영태 교수의 <파벌>이라는 책을 보았다. <파벌>은 민주노동당의 탄생부터 2008년도 분당 사태에 이르기까지의 자주파, 평등파 두 파벌간의 갈등을 정리한 책이다. 글쓴이가 비록 두 파벌에 대해 양비론을 펼치고 있긴 하지만, 파벌간의 갈등이라는 것의 배부분이 자주파의 일방적인 공세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에, 자주파의 비민주적이고 패권적인 행태가 책 안에 잘 드러나 있다. 이번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파문 역시, 당 내에서 당권파가 다른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만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가 사건이 커졌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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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다른 점은 지켜보는 눈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2008년도와 달리 지금은 전 국민이 괴물이 된 당권파의 모습을 연일 뉴스보도와 인터넷으로 지켜보고 있다. 부정경선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에 급급한 뻔뻔함, 한 줌의 권력이라도 끝까지 잡으려고 하는 저열한 패권주의적 행태, 심지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이 상관없는 듯, 폭력까지 마다하지 않는 그들에게 국민들은 등을 돌려버렸다. 부정경선은 엄연히 당내의 문제였으므로, 부정의 의혹을 받고 있는, 그리고 당내에서 가장 큰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는 당권파가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면 비교적 손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막가는 것’을 택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통합진보당 내 파벌간의 갈등조정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번일로 진보세력이 입은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진보세력의 핵심이었던 당권파가 ‘진보’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 다른 정파에 속해있는 진보세력까지 대중적 지지를 잃게 될 판이다. 대중들에게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이 통합진보당으로 인식됐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진보의 ‘파이’가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당권파를 항복시키거나, 그들과 차별화되는 진보정치세력을 규합해서 다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사태 해결방안 중 어느 하나를 실현시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권파는 쉽게 굽히지 않을 작정인 듯 하고, 그들과 갈라선다고 해도 대중정당과, 진보운동을 할 수 있는 대중조직을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 썩어있는 고인물을 퍼내려는 노력을 해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진보의 비극은 북한에 대해서는 항상 입을 다물고,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민주적인 집단이 진보세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당권파의 행태는 대중적인 지지를 모으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져왔다. 2007년 대선 때, 당시 자주파가 주장한 ‘코리아 연방제’와 같은 대선 공약을 보더라도 그들이 중요한 정치적 시기에도 이념에 갇혀 대중의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중 친화적이지만, 반대로 진보정치를 열망하는 대중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행동양식과 생각을 갖고 있다. 진보세력 스스로 당권파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행 중 다행히도 진보세력이 당권파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들은 수많은 대중조직을 거느리고,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자 세력들의 지지도 받으면서 실질적으로 진보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모든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제 다양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설 차례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단순히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대중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진보의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현실 정치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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